한국 대표 싱크탱크를 가다 - 최병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

‘100대 싱크탱크’ 정치·사회 부문 1위…한국형 창조 경제 복지 모델 만들기 나서
[스페셜 인터뷰] “출산율 제고 없인 ‘통일 대박’도 물거품”
최병호(57)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스스로를 ‘연구직 공무원’이라고 부른다. 물론 공무원 연금 혜택을 받는 정식 공무원은 아니다. “정부 정책에 기여하는 것을 본분으로” 일해 왔다는 뜻이다. 최 원장은 그런 ‘연구직 공무원’ 생활이 31년째다. 1983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연구원으로 들어갔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KDI 시절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이덕훈 전 우리은행장 등 쟁쟁한 선배들과 국민연금 도입의 밑그림을 그렸고 2000년대 초반엔 장기요양보험 시행의 실무 총책임을 맡았다. 최 원장은 201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에 오르면서 연구원을 ‘사회정책 분야의 대표 연구 기관’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한경비즈니스에서 실시한 ‘2014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 조사’에서 사회·정치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월 19일 은평구 불광동 연구원 본원에서 최 원장을 만났다.


연구원은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1971년 가족계획연구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출산율이 너무 높아 이를 낮추기 위한 가족계획이 주 임무였어요. 출산율을 조금이라고 끌어올리려고 골몰하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옛날 이야기죠. 4대 사회보험과 국민 건강 증진, 노인 문제, 장애인 문제 등 국민의 삶과 밀접한 영역을 연구합니다. 양극화와 가족 해체, 정신 건강, 4대 중독 같이 한국이 선진사회로 가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여러 현안도 포괄하죠.


원장님이 말씀하시는 ‘한국형 창조 복지’는 무엇입니까.
원장이 되면서 한국형 창조 복지 모델을 만드는 걸 목표로 세웠지요.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는 창조 경제의 문제의식을 복지 분야에도 접목할 수 있어요. 핵심은 한국형 모델이 돼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복지 쪽에서 스웨덴 모델이나 독일 모델을 많이 이야기하고 배우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한국인은 복지에 대한 인식과 마인드가 유럽과 달라요. 가족 개념도 마찬가지고요. 경제구조나 정치 사회적 발전 과정으로 봐도 한국의 위치는 스웨덴이나 독일과 크게 다르죠. 한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복지도 압축적으로 성장했어요. 흔히 말하는 유럽식 복지병을 해결하려면 한국 상황에 맞는 창의적인 모델이 나와야 해요.


참고할만한 해외 사례는 없습니까.
독일은 독일식 모델이 있고 스웨덴은 스웨덴식 모델이 있죠. 또 미국은 미국식 모델이 있고요. 동아시아 지역을 보면 일본은 일찍 개방해 먼저 선진국에 진입했어요. 한국은 대만·싱가포르·홍콩과 함께 뒤늦게 이 대열에 동참했죠. 이들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4개국은 다행히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 급격한 경제성장에 성공했죠. 높은 출산율과 풍부한 노동인구, 높은 저축률 등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말한 ‘자본의 양적 투입을 통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도 했고요. 사회정책과 관련해서도 이들 4개국을 서로 비교하고 참고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최근 통일한국의 적정 인구수도 연구하셨는데요.
경제 분야는 여러 가지 통일 대책이 논의되고 있어요. 사회정책 분야도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합니다. 갑작스럽게 통일이 이뤄질 때 ‘북한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북한의 사회 안정망은 어떤 식으로 만들 것인가’를 연구해야죠. 적정 인구수 연구는 통일이 대박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되려면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하는지 알아본 겁니다. 2100년 통일한국이 주요 7개국(G7) 국력의 70% 수준에 도달하려면 인구수가 8700만 명이 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지요. 통일 대박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출산율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지금 상태라면 2100년 남북한 인구가 5000만 명을 밑돌죠. 올해부터 통일에 대비한 연구를 꾸준히 해나갈 거예요.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공약이 후퇴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복지 재정이 10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복지에 더 많은 돈을 쓰면 다른 쪽을 줄여야 해요. 국가 부채는 오히려 더 줄여야 할 상황이고요. 정부로서는 쉽지 않은 처지죠. 어떻게든 복지를 늘리기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줄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대통령 선거 때 여러 가지 복지 공약을 내걸었지만 현실적으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요. 국민에게 이런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해야 해요. 역대 정부들도 수많은 공약을 했지만 그대로 지킨 적이 많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공약의 진정성이죠. 공약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건강보험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성공한 사례에 속하죠. 몸이 아플 때 얼마나 쉽게 양질의 의사를 만나고 양질의 시설에서 치료 받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만큼 잘돼 있는 나라는 없어요. 외국 사람들도 깜짝 놀랄 정도죠. 다만 환자의 본인 부담이 많다는 게 문제죠. 역대 정부가 그걸 개선하려고 계속 노력해 왔어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런 기조를 유지했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4대 중증 질환만 확실하게 잡겠다는 정책이죠. 한 번에 모든 걸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큰 방향에서는 제대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경제 시스템이 박리다매형이에요.
음식점이나 백화점이나 모든 매장이 박리다매로 돈을 벌죠. 대부분의 가게에 사람이 미어터지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하는 구조인 거죠.”



의료계에서는 저수가 문제를 지적하는데요.
한국이 저수가 체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환자들이 병원을 자주 방문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병원들도 환자 수가 많으니까 저수가로도 견뎌낼 수 있는 거죠. 만약 의료계의 요구대로 수가를 인상하면 환자가 크게 줄어들 겁니다. 수가를 올리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해 판단하기가 쉽지 않죠. 한국은 경제 시스템이 박리다매형이에요. 음식점이나 백화점이나 모든 매장이 박리다매로 돈을 벌죠. 대부분의 가게에 사람이 미어터지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하는 구조인 거죠. 반면 외국에 가보면 매장에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요. 의료 수가를 올리더라도 전반적인 시스템을 먼저 바꾸고 올려야 합니다.


국책 연구소 체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책 연구소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체제입니다. 정부의 정책을 연구하지만 정부 조직은 아니죠. 그렇다고 완전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갖는 것도 아니에요. 국민의 세금을 받는 이상 정부 정책에 기여해야죠. 일본은 정부 안에 이런 연구소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공무원 신분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공직자라고 생각합니다. 학계에서 국책 연구소 시스템에 대한 존폐 논란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필요하다고 봐요. 현재 국책 연구소가 없으면 정부가 정책을 펴기 쉽지 않은 구조거든요. 공무원들은 대부분이 여러 업무를 옮겨 다녀요. 누군가는 하나의 정책을 맡아 꾸준히 연구해야죠.


올 연말 세종시 이전은 계획대로 추진됩니까.
세종시로 가면 정부 청사와 가까워져 좀 더 밀접한 업무 협조가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걱정이 많아요. 연구원 중 절반이 넘는 55%가 여성이죠.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교육문제가 큰 고민이에요. 남편 직장이 대부분 서울이기 때문에 혼자 내려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연구해 온 연구원들이 정작 자기 문제로 고민하게 된 거죠.(웃음)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