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이 주도해 낸 ‘착한 가격’…관련 업계도 호황
해외 브랜드 제품은 한국에만 오면 가격이 뻥튀기하듯 부풀려진다.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호갱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가만히 당할 리 없는 요즘 소비자들은 해외 사이트에서 직접 구매(직구)를 하며 원하는 제품을 원하는 가격에 산다.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지나치게 비싼 가격을 바로잡으려는 대책으로 ‘병행 수입 활성화’ 방안을 모색 중이다.해외 직구, 국내보다 최대 80% 저렴
지난 2월 20일 오전 9시 인천공항세관 수출입통관청사 세관검사장. 통관 중인 우편물들이 쉼 없이 옮겨진다. 모두 해외 쇼핑몰에서 보내온 ‘직구 상품’들이다. 이날 하루 통관된 박스는 모두 4000여 개. 내용물은 옷이나 가방, 신발 등의 패션 제품에서 TV·화장지·그릇·건강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김재석 인천공항세관 관세행정관은 “2013년 해외 인터넷 쇼핑을 통한 국제 특송 화물의 반입량은 1000만 건으로,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해외 직구 전성시대’다. 해외 직구는 인터넷을 통해 외국 업체의 현지 사이트에서 물건을 직접 구입해 배송 받는 시스템을 말한다. 소비자들이 직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저렴한 가격’과 ‘차별화된 상품’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보통 수입품은 유통 마진과 마케팅 비용 등이 포함돼 해외 현지 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판매된다. 그러나 직구를 이용하면 현지 가격에 배송비와 세금을 더해도 같은 제품을 최대 80% 정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지난겨울 품귀 현상을 빚었던 캐나다구스는 국내에서 100만 원을 웃돌지만 직구로는 배송료·관세를 포함해도 70만 원대에 살 수 있다.
‘한국에 없는 제품을 살 수 있다’는 가치 부여도 소비자들을 열광케 하는 이유다. 2008년 해외 직구 인터넷 카페에 가입한 뒤 꾸준히 이용하고 있는 주부 박모(38) 씨는 “아기 분유와 기저귀, 장난감 등과 영양제까지 국내에는 없는 해외의 우수 제품들을 추천받아 산 이후 가격이나 품질 모두 만족스러웠다”며 “영어로 해야 하고 배송이 다소 늦어 조금 번거롭긴 하더라도 계속 직구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구 열풍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거나 국내에 없는 수입 화장품, 유아 용품 등을 찾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노하우가 번져 갔고 이어 해외 배송 대행 업체 등이 가세하면서 지난해 2조 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이 직구로 해외 온라인 쇼핑을 하는 시대가 됐다. 업계 전문가들은 “스마트한 소비자들이 주도한 직구 열풍이 폐쇄적이던 국내 유통시장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직구 방법은 세 가지다. ▷구매 대행 업체에 제품을 사달라고 위임하는 구매 대행(대리 구매)과 ▷직배송(직접 미국 쇼핑몰에서 한국의 집까지 운송) ▷배송 대행(직접 구매해 배송 대행 업체를 통해 한국에서 받는 방법)이 있다. 보통 ‘구대(구매 대행)’, ‘배대(배송 대행)’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구매 대행은 직구가 어려운 소비자들을 위해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원하는 제품을 대신 구매해 전달한다. 편리한 대신 수수료를 내야 하는 단점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몰테일·유니옥션·오마이집 등 배송 대행 업체를 통해 주문하는 것이다. 해당 사이트에서 원하는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아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주문 국가 온라인몰에서 같은 국가 내에 물류센터가 있는 배송 대행 업체로 제품을 보내고, 배송 대행 업체가 다시 한국으로 제품을 보내는 방식이다.
해외 직구가 늘면서 배송 대행 업체들도 덩달아 성장세다. ‘몰테일’은 해외 직구 열풍 덕에 회원 수가 부쩍 늘었다. 2014년 2월 현재 약 65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 매출은 400억 원, 배송 대행 건수는 100만 건으로 3년 만에 13배나 늘었다. ‘아이포터’도 수혜주다. 2014년 2월 현재 회원 수는 약 16만 명이며 하루 평균 거래 건수는 1000~1500건 정도다. 이용자가 늘면서 배송 대행 업체의 서비스도 발전하고 있다. 현지에 물류센터를 두는 것은 기본이고 상품 검수까지 직접 마쳐 제품을 국내로 보낸다. 이르면 이틀 안에 배송해 주고 최대 한 달까지 상품을 무료 보관해 주기도 한다. 몰테일은 미국에만 3개, 이 밖에 독일·중국·일본에 물류센터를 세웠다. 아이포터는 미국 캘리포니아·오리건·뉴저지 3곳과 일본 등 총 4개 지역에 물류센터를 운영한다. 몰테일과 아이포터는 ‘해외 직구 초보자를 위한 강의’도 연다. 강아름 아이포터 EC운영기획팀 팀장은 “처음 해외 직구를 접하는 소비자들의 신청 건이 늘어나면서 문의가 많아져 강의를 개설하게 됐다”며 “기업 강의도 한다”고 했다.
해외 직구라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거래 규모가 늘면 피해 사례도 늘게 마련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배송 지연·애프터서비스·환불·교환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해외 구매 대행 서비스 이용 후 피해 상담 사례는 지난해 964건을 기록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행 업체까지 등장했다. 물건에 하자가 있거나 잘못 배송되면 판매 업체 측에 대신 전화해 불만을 전달해 주는 통화 서비스 대행 업체다.
병행 수입 활성화, 유통 업계 희비 교차
물류 대기업들도 배송 대행 서비스에 나섰다. 한진은 해외 배송 대행 플랫폼 ‘이하넥스’를 운영한다. 미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한 제품을 국내로 배송한다. 교민이나 유학생을 대상으로 국내 상품을 해외로 보내기도 한다. 미국 현지에 고객 서비스센터도 세웠다.
정체기를 겪던 오픈 마켓과 소셜 커머스 업체도 해외 직구 시스템을 도입했다. G마켓은 ‘글로벌쇼핑’, 옥션은 ‘원클릭 지구’를 선보였다. 위메프도 지난해부터 해외 직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처럼 소비자들이 만들어 낸 직구 문화는 유통 업계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수입 가격 거품을 빼는 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정부도 ‘병행 수입 활성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병행 수입은 해외 상품의 국내 독점 판매권을 가진 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가 별도의 경로로 상품을 국내에 들여와 팔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에 따라 그동안 독점 수입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했던 백화점과 독점 수입 업체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병행 수입과 해외 직구를 통해 소비자가 해외 상품을 비교적 싸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기존 가격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대형 마트나 홈쇼핑은 병행 수입이 매출을 늘릴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병행 수입의 주요 아이템인 패션 잡화의 경우 상대적으로 고마진 제품이라는 점이 대형 마트에 특히 유리하다. 또 병행 수입이나 해외 직구족들의 관심 상품이 아닌 식품이 매출의 70%라는 점 등에서 오히려 사업을 확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마트는 2009년 10억 원에 불과했던 병행 수입 매출이 지난해 600억 원으로 60배 가까이 뛰었다. 올해 병행 수입 매출 목표는 800억 원. 이마트 관계자는 “해외 업체와 더 많이 접촉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병행 수입 상품을 들여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CJ오쇼핑의 지난해 병행 수입 제품 매출은 200억 원으로 처음 제품을 팔기 시작한 2010년 65억 원에서 3배 이상 올랐다.
이처럼 해외 직구와 병행 수입이 확대되면서 이제 국내 오프라인 업체는 기존 온라인은 물론 해외까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어찌됐든 소비자에겐 반가운 일이다. 다양한 물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유통 경로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스마트 소비가 불러온 소비 혁명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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