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사도 포기한 써니텐 살린 광고 카피…생각 틀 깨면 위기도 기회

요즘도 ‘써니텐’이란 음료를 선전할 때 어김없이 ‘흔들어 주세요!’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흔들면 탄산가스가 확산돼 봉변당하기 십상일 텐데 왜 그렇게 광고하는 걸까. 1968년 처음으로 한국에 코카콜라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그 황홀한 맛에 흠뻑 빠졌다. 그전까지 월성콜라와 같은 토종 콜라와는 차원이 다른 맛을 누구나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재래 중소 회사의 콜라는 자취를 감췄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막다른 골목에 서야 숨은 길이 보인다
입맛이 업그레이드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미군 부대에서 나온 오렌지 주스라는 게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통해 유통되면서 그 맛에 대한 동경도 생겼다. 물론 코카콜라의 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마시는 노란색 천연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은 욕망까지 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소득수준으로는 언감생심. 그래서 사람들은 탕(Tang)이라는 분말을 얼음물에 타 마시기도 했다. 바로 이 틈새를 파고든 게 써니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최초의 본격 틈새 상품이랄까.

과즙 음료에 대한 동경과 구매 수준의 격차는 가수요라는 경제 용어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바로 약간의 과즙을 탄산음료에 섞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텐’이란 바로 ‘과즙 10%’를 의미하는 이름이다.


단점을 장점으로…허를 찔러라!
제품을 개발하면서 광고를 의뢰했는데 막상 시제품을 뽑고 나니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음료수보다 비중이 높은 과즙이 아래로 가라앉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마치 막걸리처럼…. 막걸리는 요즘처럼 웰빙 알코올(?)이 아니라 싸구려 술이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연상 작용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존의 탄산음료보다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줘도 모자랄 판에 싸구려 술을 떠올리게 하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 정도였다.

막다른 골목(dead lock)에는 두 가지 길뿐이다. 첫째, 되돌아 나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담을 넘어가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되돌아 나온다. 안 되는 길은 돌아 나오는 게 상책이다. 제조회사에서는 당연히 제품 생산을 포기했다고 광고회사에 통보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치명적인 약점을 역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처음엔 낙담했을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광고가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됐으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팀원의 사기를 진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담당 팀장은 회식을 했다고 한다. 회식을 마치고 고고장(당시에는 나이트클럽을 그렇게 불렀다)에 갔다. 신나게 춤을 추는 젊은 사원들과 달리 지금의 팀장에 해당되는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맥주만 들이켰던 모양이다. 그러다 춤추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떠올렸다. “못 믿겠다고? 이거 봐. 밑에 쫙 가라앉은 거 안 보여? 보니까 믿겠지?” 그래서 골라낸 광고 카피가 바로 “흔들어 주세요”였던 것이다. 대박이 났다. 써니텐의 성공에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햇빛으로부터 과즙의 발효를 막기 위해 맥주처럼 갈색 병을 써야 했는데, 이게 시각적으로 좋지 않았다(그리고 알코올에 약한 사람은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거나 발효 과정에서 일종의 술 효과가 있었으니까. 특히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과즙의 경우에는 그게 심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식용색소로 대체했다(그러면서도 이름은 여전히 써니텐 그대로다. 지금까지 쭈욱~). 그리고 병도 투명 유리병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예전의 과즙이 어디 갔느냐고 따지기는커녕 시각적 만족을 더 즐겼다. 지금도 써니텐에는 단 1%의 천연 과즙도 없다. 그런데도 이름에는 여전히 ‘텐’이 들어 있고(회사에서야 다른 뜻을 적당히 둘러대겠지만) 광고 카피도 여전히 ‘흔들어 주세요’ 그대로다. 한 번 굳어진 건 내용이 바뀌어도 그렇게 요지부동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런 배반은 가끔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열심히 책 읽기를 권장한다. 책 읽는다는 데 시비할 일은 전혀 없다. 그러나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엉뚱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 굳이 말한다면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고 여행의 계절이다. 그걸 깬 게 바로 출판사였다.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매출 현황을 점검해 보니 가을에 판매량이 뚝 떨어진다는 걸 확인했다. 기업으로서는 꾸준한 매출이 경영에 도움이 되는데, 한 계절만 매출이 급감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대책이 뭔가 고민 끝에 나온 마케팅 전략이 바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카피였던 것이다. 그 뒤로 가을에 많은 책을 팔았다나 뭐라나.


뇌와 심장의 굳은살을 도려내라
우리 조상들은 슬기롭게 책 읽기 좋은 때를 골라냈다. 삼여지공(三餘之功)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삼여란 독서삼여(讀書三餘)라 하여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세 가지의 여유 시간이라는 뜻이다. 한겨울과 깊은 밤, 그리고 오래 내리는 궂은비를 뜻하는 음우(陰雨)를 말한다. 모두 활동적인 바깥일을 하기 어렵거나 불편한 시간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수 없는 이 시간들이야말로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다독였던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들이 바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가을은 자연으로 나가 계절을 만끽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여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광, 넉넉한 한 해의 마무리까지 덤으로 얹힌 가을이야말로 여행하며 사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가을에 책을 읽지 말자는 게 아니다. 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숙성하고 체험하고 두루 견문을 넓히는 데 힘쓰고, 바깥나들이에 적절하지 않은 시간들을 골라 틈틈이 책을 읽어 삶을 살찌우는 게 더 낫다는 의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대신 책 하나 들고 떠나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읽는 독서다.

얼마 전만 해도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음악감상·독서·사색 등이라고 대답한 적이 많았다. 때론 미술 전람회에 거의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미술 감상이 자신의 취미라며 고상을 떠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등산·수영·스케이팅·스키·골프·자전거 타기 등이라고 대답하는 이가 훨씬 더 많다.

왜 그렇게 대답이 달라졌을까. 삶의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일상의 일이란 게 주로 근육을 사용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여가 시간에는 피로해진 근육을 쉬게 하고 달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근육운동에 의존한 생활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러니 쉬는 때 즐기는 취미란 게 예전과 달리 위축된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으로 변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근육 활동적인 취미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피곤해진 근육이 외려 부담스러워 한 주를 시작하는 게 뻐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지면서 삶의 활기와 동력을 거기서 얻게 되는 걸 체험하게 되고 열중하게 됐다. 게다가 요즘처럼 자동차가 보편화된 상황에선 많은 사람들이 시간만 나면 멀리 밖으로 나가 여가를 만끽하려고 한다. 공원에 가도, 헬스센터나 수영장에 가도 사람들로 넘친다. 이젠 아무 일 없이 집에만 있으면 무슨 큰 손해라도 보는 양 불안할 지경이다. 그야말로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인지도 모를 형편이다.

삶에 자극을 주고 휴식을 얻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차분하게 한 주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조용하게 사색하며 가늠하는 게 드물게 됐다. 쉬는 게, 휴식이 꼭 그렇게 근육을 적당하게 움직이게 하고 자극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위(無爲)에 가깝게 긴장의 끈을 놓고 정신적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취미, 그러니까 예전에 그리도 흔하게 대답했던 그 취미들도 적당히 누려야 한다.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이제는 누가 취미를 물으면 등산과 독서, 달리리기와 미술 감상, 수영과 음악 감상이라고 넉넉하게 답할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세상이 나를 하나의 틀로 만들어 온 게 적지 않을 것이다. 텍스트는 그런 힘으로 나를 순치시킨다. 자신의 앎과 삶은 그렇게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게 짜 맞춰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런 틀은 자신을 좁은 옹벽 속에 가둔다. 그걸 깨야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긴다. 말로만 창조 경제를 떠든다고 창조적인 일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항간에 떠도는 ‘참죠 경제’라는 비아냥거림을 벗어나려면 틀에 박힌 생각과 텍스트의 프레임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삶이, 세상이 멋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