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조사 아시아 랭킹 5위 올라… 순발력·네트워크 무기로 급성장

“내실 있는 독립 싱크탱크 더 나와야죠”
[스페셜 인터뷰] 한국 대표 싱크탱크를 가다 -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2008년 문을 연 아산정책연구원은 최근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젊은 싱크탱크다. 작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싱크탱크와 시민사회프로그램(TTCSP)’이 실시한 글로벌 싱크탱크 조사에서 아시아 지역 부문 5위에 올라 큰 화제가 됐다. 한국 싱크탱크 중에서는 한국개발연구원(KDI, 3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순위였다. 아산정책연구원의 힘은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에서 나온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설립자 겸 명예 이사장이다. ‘독지가의 기부’와 ‘독립적인 정책 연구’라는 미국형 싱크탱크 모델에 가장 가까운 연구소로 꼽힌다. 함재봉(56) 아산정책연구원장은 “사회의 발전 단계로 보아 이제 한국도 공공 섹터에서 내실 있는 독립 싱크탱크가 나올 때가 됐다”며 “그러려면 공익 재단들이 자선 위주의 활동에서 벗어나 정책 연구와 싱크탱크 활성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원의 성장 속도가 놀랍습니다.
2010년 3월 귀국해 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행정 직원 4명이 전부였지요. 새로 지은 이 큰 연구원 건물이 텅텅 비어 있었죠(아산정책연구원은 2010년 1월 경희궁 뒤편에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의 현대적인 단독 건물을 준공했다). 이제는 연구원 인력이 박사급 연구위원 18명을 포함해 70~80명 정도로 늘어났어요. 4년 동안 엄청나게 커진 거죠.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고민하던 정몽준 의원이 대학 은사인 이홍구 전 총리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선친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미 다 해 놓아 새로 할 게 없더라는 거죠. 한국 최초이자 최대인 복지재단을 세워 병원을 만들고 장학 사업도 했거든요. 그때 이 전 총리가 세계적인 싱크탱크를 한국에서도 만들어 보라고 조언했다고 해요. 정 의원이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아 워싱턴 싱크탱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요.


설립 배경을 좀 더 설명해 주세요.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발전 경험에서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바로 싱크탱크의 역할입니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산업연구원·국토연구원 같은 두뇌 풀을 만들어 활용했지요.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은 사례고 굉장히 성공한 모델이죠. 198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국책 연구소 외에 기업 연구소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삼성경제연구소·현대경제연구원·LG경제연구원이 다 그때 만들어졌죠. 민주화 이후에는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이들과 다른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연구소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재정적인 기반이 취약하고 연구 본연의 역할보다는 사회운동 차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죠.


많은 사람이 미국 싱크탱크를 부러워합니다.
선진국 예를 보면 자본주의가 발달해 자본이 쌓이고 거기서 나오는 잉여가 늘어나면 그걸 사회에 환원하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힘과 활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공익 재단이죠. 앤드루 카네기부터 헨리 포드, 존 록펠러, 존 맥아더까지 전부 큰 재단을 설립했어요. 사회 환원은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짓고 도서관을 세우는 것도 있지만 싱크탱크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죠. 세계 최고라는 브루킹스연구소도 로버트 브루킹스라는 독지가가 낸 돈으로 출발했거든요.


연구의 독립성은 어떻게 보장됩니까.
사회과학자들은 ‘후원자 고객(patronclient)’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돈을 내는 사람이 그 돈을 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연구하라고 요구하면서 고객이 되는 거죠. 국책 연구소는 정부에서 돈을 내니까 각 부처 요구에 맞게 연구를 합니다. 기업 연구소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미국의 싱크탱크는 그런 구속에서 자유예요. 독지가들이 돈을 내지만 운영에선 손을 뗍니다. 연구소가 이사회를 통해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놀라운 결단이 미국의 강력한 싱크탱크를 탄생시킨 겁니다. 한국에서는 아산정책연구원이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 가고 있죠. 앞으로 한국에서 싱크탱크가 살아남으려면 이런 모델로 가야 해요.


공익 재단들의 관심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싱크탱크 생태계가 중요합니다. 미국은 모든 재단이 자신과 연관된 싱크탱크만 지원하지 않아요. 공개적으로 지원서를 받아 선정하죠. 싱크탱크들은 매년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록펠러재단부터 빌&멜린다 게이츠재단까지 수많은 재단에 지원서를 내고요. 큰 재단들은 그걸 평가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다 확보하고 있어요. 이 속에서 진정한 지식 경쟁이 이뤄지는 거죠.


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은 없습니까.
외국도 싱크탱크 책임자가 하는 일 중 90%가 펀딩이에요. 미국의 큰 연구소 소장들도 모금 활동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할 정도죠. 그런 점에서 저는 행운아죠.(웃음) 연구 프로그램에만 몰두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춰져 있거든요.


급성장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한 것도 있지만 절묘하게 때가 잘 맞았어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내실 있는 독립 싱크탱크에 대한 잠재 수요가 엄청났어요. 모두가 그런 싱크탱크의 출현을 기다려 온 거죠. 가장 피부로 느끼는 것은 외국인들의 수요예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고위급 인사들이 많아졌어요. 정부와 국책 연구소를 가보고 나면 항상 독립적인 싱크탱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외국 학자와 정책 담당자들의 요청이 폭발적이에요. 케네디스쿨 같은 대학이나 투자은행에서도 요청이 옵니다.


연구원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기존 연구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순발력과 네트워크가 강점이죠. 상대적으로 젊고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매우 빨라요. 특히 한국의 외교·안보 상황은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에 대응 속도가 중요하죠. 사건이 터지면 필요한 국내외 전문가를 신속하게 모아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해요. 게다가 속도뿐만 아니라 깊이도 필요하죠. 연구원의 해외 네트워크는 한국 최강이에요. 명예 이사장인 정몽준 의원과 이홍구 전 총리, 한승주 전 이사장의 네트워크가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또한 유네스코 사회정책국장과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쌓은 제 경험과 각 분야 톱클래스인 연구원 박사들의 전문성이 더해져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죠.
[스페셜 인터뷰] 한국 대표 싱크탱크를 가다 -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사회 환원은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짓고 도서관을 세우는 것도 있지만 싱크탱크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죠. 세계 최고라는 브루킹스연구소도 로버트 브루킹스라는 독지가가 낸 돈으로 출발했거든요.”


연구원의 맨 파워는 어떻습니까.
초기에는 인력 확보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몽준 의원의 개인 정책연구소라는 오해 때문이었죠. 여의도에 ‘해밀을 찾는 소망’이라는 개인 싱크탱크를 따로 열었지만 오해가 줄지 않았어요. 국책 연구소나 기업 연구소에서는 가질 수 없는 놀라운 기회라고 설득했죠. 연구원에 정해진 어젠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들이 들어와 정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고요. 연구원에 와서 전공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아 회의를 조직하라고 했고 실제로 그걸 다 지원해 줬어요. 박사 학위를 갓 딴 젊은 학자가 그런 기회를 갖는 건 드문 일이죠. 요즘 대학교수든 국책이나 기업 연구소 연구원이든 이런저런 일에 치여 자유로운 연구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한국의 젊은 인재들의 잠재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주면 펄펄 날거든요.


지난해 가장 큰 성과는 무엇입니까.
워싱턴과 베이징에서 대규모 포럼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어요. 그동안은 모든 포럼을 서울에서 열어 왔죠. 미국 싱크탱크와 손잡지 않고 단독으로 연구원 이름을 걸고 워싱턴 한복판에서 포럼을 열었죠. 그동안 쌓은 역량과 인지도를 시험해 보는 성격도 있었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딕 체니 미국 전 부통령, 윌리엄 코헨 전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전 세계은행 총재 등 300여 명이 모여 이틀 동안 행사를 진행했어요. 베이징에서도 250여 명이 참석했고요. 올해는 워싱턴과 베이징에 박사들이 2명씩 상주하는 사무소를 열 예정이에요. 미 의회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도 계획 중이죠.


함께 운영하는 아산서원은 어떤 프로그램입니까.
연구원과 아산나눔재단이 공동으로 설립한 미래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에요. 조선시대의 전통 서원과 영국 옥스퍼드대의 ‘철학·정치학·경제학(PPE)’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겁니다. PPE는 영국 엘리트들의 산실이에요. 현재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포함한 내각 대부분이 PPE 출신이죠.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도 PPE를 나왔고요. 1년에 2번 30명씩 선발해 5개월 동안 인문학 교육을 합니다. 연구원 바로 옆 건물을 사서 기숙사로 사용하죠. 역사·동양철학·서양철학·정치·경제·문예로 나눠 고전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해요. 이 과정이 끝나면 워싱턴과 베이징의 싱크탱크에 파견돼 5개월 동안 인턴 과정을 거치게 되죠. 현재 4기생들이 워싱턴과 베이징에 나가 있고 2월엔 5기를 뽑습니다.


대담 김상헌 편집장·정리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