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치가 아니라 김장입니다. 김치는 산업이고 김장은 문화입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것 같아도 인문학적으로 따지면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만난 사람 맛난 인생] “한국도 이제 음식학을 만들어야죠”
김치와 김장을 두부 자르듯 가르는 사람이 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다. 그는 먹을거리를 음식 조리, 식품 영양이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시적인 안목에서 종합 분석하는 음식 인문학자다.

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의 대상은 소멸 위기에 처한 전통 예술이나 축제, 공예 기술, 생활 관습이라는 것.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상품이 아닌 문화, 즉 전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 문화유산을 요구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인류 무형유산에 오른 내용도 ‘김장 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라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무형유산의 상업적 이용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어요. 2010년 등재된 ‘프랑스 미식’, ‘지중해 요리 문화’ 등도 특정한 요리가 아니라 음식 예절과 조리법을 포함한 요리를 둘러싼 ‘문화’를 인정한 겁니다.”

주제를 돌려 김장 문화의 어떤 점이 유네스코의 인정을 받았는지 물었다.


김장은 이웃과 함께 만드는 문화
“김장은 혼자 하기 힘들어 이웃과 함께 어울려 품앗이로 작업합니다. 넉넉하게 담가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이나 며느리에게 보내기도 하고 못사는 사람에겐 그냥 나눠 주기도 하잖아요.”

김장의 유네스코 등재는 김치의 상품화 및 국제적 인지도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은 자명하다. 주 교수 역시 김장을 강조하지만 김치를 무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단지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김장이라는 우리 전래의 공동체 문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고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1970년대 만해도 김장 보너스라는 게 있었어요. 회사의 작은 배려였지만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조직원들에겐 큰 도움이 됐지요. 이런 노사 문화는 다시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유급휴가도 제안했다. 가족 해체 시대에 식구들이 모두 참여하는 김장 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김장 유급휴가 제도를 도입하라는 것. ‘김장 보너스에 유급휴가’라…. 주부들, 아니 누가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도는 상상이다.

“김장 문화가 가장 절실한 곳은 교육 현장입니다. 단체 급식을 하는 유치원·초등학교·중고등학교로 김장 문화를 넓혀가는 겁니다. 단체 급식이 가지고 있는 ‘입맛의 획일화’란 단점도 극복하면서 김장 문화를 지키는 산교육이 가능해집니다.”

주 교수의 원래 전공은 역사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어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졸업 후 뜻하지 않게 먹는 것과 인연이 맺어진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식품 회사에 취직했다가 그곳의 김치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김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높아졌어요. 강인희·윤서석·장지현 선생님 등 당시 전통 음식이나 음식사를 연구하는 원로들을 그때 만났어요.”

이후 그는 음식이 가진 역사 문화적 배경을 연구해 보기로 하고 1993년 ‘김치의 문화 인류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한양대 석사학위를 받는다. 요즘도 그를 ‘김치박사’라고 하는 건 김치박물관의 근무 경력과 석사 논문 때문이다.

석사학위를 받고 일단 음식에 대한 인연을 접는다. 베이징 중앙민족대 대학원으로 떠나 4년 만에 ‘쓰촨성 소수민족의 전통 칠문화 연구’로 민족학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한다.

“돌아와 보니 제 전공으론 먹고살 길이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음식과 문화의 연결고리에 대한 연구에 나서 개론서인 ‘음식전쟁 문화전쟁(2000년)’이란 책을 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음식 역사학자보다는 민속학자로서의 연구·집필 활동을 더 많이 한다. 음식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07년 일본 가고시마대의 인문학과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부터다.


음식 솜씨도 한중일 3국 넘나들어
“제가 음식 역사를 수십 년 동안 파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불과 7~8년밖에 되지 않아요.” 두루뭉술하게 김치박물관 근무부터 따지면 30여 년의 연구 경력이 될 텐데, 거침없이 당당하게 까발린다.

요즘 주 교수를 찾는 교수들이 많다. ‘한 수’ 가르침을 받으려는 건데, 대부분이 음식 전문가다. 식품 영양학자, 요리 연구가, 식품 공학자 등으로 동년배나 손윗사람도 많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저를 음식학자로 인정해 주지 않던 원로까지 제 강의를 들으려고 먼 곳에서 오십니다.”

주 교수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다. 어린 시절 밥상에 대한 기억을 물었더니 “화려한 밥상”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교육 공무원인 아버지 직업으로 보면 화려한 밥상이란 답은 턱도 없게 들리겠지만 종갓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수준급이었으니까요.”

어머니의 음식 가운데 다시마를 끓여 국물을 내고 무를 썰어 넣고 생선조림을 하는 것 등은 일본 조리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했다. 주 교수는 주방에 대해서도 거리낌이 없다. 남자들이 주로 요리하는 중국에서 4년 동안 생활한 때문도 있지만 결혼 전 한국에서도 직접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잘하는 요리도 당연히 있을 터. 역시 한중일 3국을 국경 없이 넘나든다.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에게 미역국도 끓여 줬다가 중국식 채소볶음도 해먹이다가 특별한 날엔 사시미 칼을 들고 스시를 내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요리를 물으니 ‘김치박사’답게 김치란 답이 돌아왔다.

주 교수는 최근 발간한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1980년대를 한국 외식 산업의 도입기 내지 태동기로 분석했다. 2014년 현재도 이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초기 수준으로 본다.
[만난 사람 맛난 인생] “한국도 이제 음식학을 만들어야죠”
“한국의 외식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한양이 상업도시로 발전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 항주는 70만 인구의 도시가 되면서 국숫집·만둣집 등 전문 음식점이 100여 곳에 달했습니다. 18세기 일본의 에도도 100만 명의 인구가 모이면서 스시집·요리옥 등이 성업했지요. 이에 비해 조선시대 한양은 4대문 안에 인구 고작 4만~5만 명, 넓게 펼친다고 해도 30만 명이 넘지 않았어요. 게다가 성리학자들이 음식을 탐하는 것을 군자의 도리에 벗어나는 일로 천시하는 풍조가 있어 외식업이 발붙이기 어려운 환경이었죠.”

이후 일제강점기, 6·25전쟁의 ‘끼니 연명’이란 절박한 상황을 거치면서 ‘외식업’이란 용어는 사치의 개념으로 치부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백반을 파는 밥집의 시대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음식점·레스토랑의 시대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곧바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되면서 전문성을 잃고 헤맸으니 외식업으로서의 한식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주 교수는 한식이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따져볼 것을 주문한다.

“21세기 한국 음식은 전통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국수주의·세계화 담론이 뒤섞인 혼종의 산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음식이 최고’란 편협한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죠.”

주 교수는 요즘 ‘음식학’이란 단어에 몰입하고 있다. 음식과 조리·영양·분석·인문학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제도권 내의 학문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이 아니면 대학원에서라도 식품 산업의 예측, 공공 음식 정책 분석, 미식 훈련, 음식 평론 쓰기, 식문화사 탐구 등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음식학입니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