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일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소진한 영웅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소명(召命) 받은 직후의 일이다.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백성들의 재판에 매달렸다. 보다 못한 그의 장인 이드로가 나섰다. “자네가 하는 일이 참으로 불합리하네. 온 백성들의 재판을 혼자 도맡아 어찌할 셈인가? 일의 대소경중에 따라 중간 관리자를 뽑아 분담시키게!”진시황도 법의 제정과 시행, 이에 따른 백성들의 재판까지 자신이 도맡았다. 그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이 지나쳐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했다. 관료들에게 일을 맡기지 못했다. 이 천하의 영웅은 제국의 황제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는 순행(巡幸)길에 그만 과로로 병사하고 만다.
군주와 장수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청나라 옹정제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집무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독설로 신하들을 사정없이 후려잡았다. 옹정제는 선왕 강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13년 만에 과로사한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 치세 13년을 옹정제 자신과 관료들이 버틸 수 있는 임계점으로 보았다.
옹정제의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공교롭게 조선의 세종과 같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다. 자부심을 넘어선 오만, 강력한 카리스마와 독설로 신료들을 후려잡은 것과 과로로 유명을 달리한 것까지 비슷하다. 조선 정조도 오십보백보였다. 죽기 사흘 전까지도 직접 정무를 챙긴 세종. 죽음을 5개월 앞둔 시점에도 “옷을 입은 채로 밤을 새운 게 벌써 25일째다”라고 고백하는 정조.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원톱 시스템으로 일관했던 옹정제와 세종과 정조. 못 말리는 삼총사다.
일중독(workaholism)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개 완벽주의(perfectionism) 성향이 있어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금방 심신이 녹초가 되고 만다. 이를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이라고 한다. 불타서(burn) 없어진다(out)고 해서 소진(消盡) 증후군, 연소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고안한 말이다. ‘삼국지’에도 전형적인 인물이 있다. 제갈량이다. 공명은 위임을 모르는 완벽주의 → 일중독 → 번아웃의 단계를 착실히 밟았다.
한고조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내가 100만 대군을 통솔할 수 있을 것 같소?” “불가하옵니다!”
“그럼 10만은 어떻소?” “불가하옵니다!”
“대체 얼마란 말이요?” “폐하께서는 1만 정도가 적절하옵니다.”
“그럼 장군은?”“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사옵니다!”
유방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토록 훌륭한 장군이 왜 내 밑에 있는 거요?” “저는 병졸이지만 폐하께서는 장군들을 통솔하시니까요!”
노기가 풀린 유방이 그제야 껄껄 웃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이처럼 군주가 할 일과 장수가 할 일은 따로 있는 법이다. 제갈량은 달랐다. 모든 공문 하나하나를 친히 교정했다. 양옹이 간언했다.
“승상! 가정사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남자 하인은 논밭을 갈고 계집종은 밥을 짓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몸소 논밭을 갈고 취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일도 제대로 안 되고 심신이 피곤하여 가사가 엉망이 됩니다. 주인은 주인으로서, 하인은 하인으로서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하물며 국사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타고난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그는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事無巨細) 모든 정사를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조정의 모든 인사에 관여했다. 둔전과 다리,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의 구축은 물론 교육 문제에까지 관여했다. 중원 수복을 통한 한실 부흥은 유비 현덕의 유언이자 그 자신의 개인적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외 환경과 자신의 건강도 고려하지 않은 6년간 5차례에 걸친 북벌은 무리수였다. 그가 직접 출정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그는 제5차 북벌 도중 오장원에서 54세를 일기로 아깝게 운명한다.
제갈공명의 최후를 간파한 사마의
사람들은 ‘삼국지’ 최후의 승자로 사마의를 꼽는다. 사마의 일가는 조조 사후에 조조 일가가 천신만고 끝에 빼앗은 나라를 앉은자리에서 집어삼켰다. 난세의 간웅 조조의 뺨을 칠만큼 사마의는 노회했다. 제갈량의 사신이 도착했다. 사마의가 물었다. 그는 군사와 정치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승상께서는 근자에 침식(寢食)이 어떠하신가? 또 하시는 일은 많은가 적은가?”
“승상께서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야 주무십니다. 곤장 20대 이상의 형벌까지 친히 집행하십니다. 그런데도 식사량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마의가 자신의 부하 장수를 돌아보며 지나가듯 한마디했다. “식소사번(食少事煩)하니 공명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사마의는 식소사번, 즉 먹는 것은 적은데 일은 많으니 워크홀릭인 공명의 운이 다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공명이 울면서 말했다.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내게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선제의 유언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알아준 삼고초려의 주군 유비와 촉나라를 향한 남다른 로열티가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일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을 억압하게 되고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삶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밀어 넣는다.”
독일의 분석심리학자인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이다. 그는 리더는 조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내적 평정심을 강조한다.
“리더는 사랑과 공격적인 태도, 규율의 유무, 노동과 여가, 철저함과 관대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번아웃 신드롬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의 견해는 이렇다. ▷열정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당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히 평가하고 해결책을 찾아라 ▷매일 당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라 ▷소통이 가능한 지지자를 구하라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잘 받아들여라.
사람들은 ‘불꽃같은 삶’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국의 소녀 잔다르크나 유관순이 아니다. 이순신과 안중근도 아니다. 불꽃이 화려할수록 그림자도 짙다. 사그라지고 나면 재만 남는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하루하루의 구체적인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실존적인 존재다. 이른바 ‘피로 사회’에서 균형 잡힌 내적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사족 연전의 일이다. 존경하는 지인 한 분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가게 됐다. 그도 워크홀릭이다. 거두절미하고 단 한마디 간곡하게 당부 드렸다. “제발 8시 전에는 출근하지 마세요!” 새벽 4시고 5시고 간에 출근할 분이었기 때문이다. 번아웃을 부르는 일중독은 결코 ‘아름다운 중독’이 아니다. 나중에 듣자하니 통상 8시 전후에 출근했다는 후문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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