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금지곡에서 빠진 숨은 반전가요
대중가요는 대중 사이에서 즐겨 불려 온 세속적인 노래로, 예술가곡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유행가라고도 한다. 예술가곡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비해 대중가요는 감각적인 대중성·오락성·통속성·상업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노래는 우리 일상의 느낌과 생각 그리고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대중가요의 가사나 곡의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면 세상의 흐름과 삶의 결을 읽어 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노래를 좋아한다. 골목마다 노래방이고 어른들은 회식이 끝나면 으레 노래방에서 모임을 끝내는 게 이젠 아예 관행처럼 굳어 버렸다. 물론 노래 부르는 게 부담스러운 이들에겐 또 하나의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금지곡의 아이러니유신 독재 시절, 그 서슬 시퍼렇던 때에 이 나라에는 한 편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방송에서 틀어서는 안 되는 곡들의 목록이 만들어진 것이다. ‘금지곡’이라는 이 살생부의 위력은 대단했다. 독재자의 입맛에 거슬리는 노래는 모두 이 목록에 들어갔고 그 순간부터 그 노래들은 공중파에서는 들을 수 없게 됐다.
단 한 차례도 직접 대놓고 세상을 비판하거나 독재를 규탄한 적 없이 묵묵히 노래만 만들고 불렀던 김민기의 노래는 거의 통째로 금지곡이 됐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음반은 나오자마자 황급히 회수, 압수해 지금도 그 음반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자랑하기에 충분한 게 됐다.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데 금지의 까닭이 황당했다. 체제 비판이나 풍자 때문에 금지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니 엉뚱하게 ‘풍기문란·저속·왜풍(倭風)·반전’ 등 노래를 금지하는 이유도 코미디 대본과 같았다.
내심 막고 싶은 곡들은 젊은이들이 세상을 비판하는 내용들이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엉뚱하게 다른 것들까지 덤으로 끼워 넣어 희석하려는 까닭에 온 국민이 따라 부르던 ‘동백아가씨’조차 그 목록에 올랐다. 그렇게 국민의 정서를 보듬기는커녕 오히려 박탈하고 억압하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망상은 단순히 정치와 경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서까지 옥죄는 못된 민낯을 드러냈다.
외국 가수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의 노래까지 덤으로 금지곡에 묶였다. 그런데 정작 대표적인 반전 노래는 운 좋게(?) 빠져나갔다. 바로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Who’ll stop the rain)’라는 팝송이었다. 비만 왔다 하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장마철 지우제(止雨際) 곡쯤으로 여겨서 그랬는지, 아니면 유독 비에 대한 감성이 풍부한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1970년 CCR(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미국 출신 록밴드)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이 노래는 전형적인 반전(反戰) 노래였다.
정부의 당국자가 그걸 알았다면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도 금지곡에 넣었을지도 모르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더렵혀진 물을 정화해 다시 공급한다(Creedence Clearwater Revival)’는 그룹 이름처럼 당시 미국 팝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CCR는 1969년(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반전의 여론도 거셌을 때다) 여름 폭우 속에서 3일간 계속된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에 참석해 ‘수지 큐(Suzie Q)’,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등 10여 곡을 불렀다. CCR가 당시에 받은 강렬한 인상을 노래로 만들어 이듬해인 1970년 1월 발표하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이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다. 그러나 이 노래가 담고 있던 속뜻은 전쟁에 대한 반대였다. 민권 운동을 통해 깨달은 인종차별과 전쟁의 폭력성, 비인격성에 대한 질타가 담긴 노래였다.
이 노래의 가사를 제대로 음미해 보면 이게 얼마나 노골적인 반전가요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적당한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까닭에 직역으로만 풀어내거나 배경 지식이 없으면 그저 그런 비 노래쯤으로만 여길지 모른다. 그 가사는 이렇다.
내 기억으론 오래됐어,
기이한 구름들이 땅 위에 혼돈을 퍼붓고 있어.
어느 시대든 선한 이들은 태양을 찾으려 애쓰지.
난 궁금해. 여전히 궁금해.
누가 이 비를 멈출 건지.
난 버지니아에 갔어.
폭풍우 피할 피난처를 찾아.
우화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탑이 자라나는 걸 보았어.
5개년 계획과 뉴딜 정책은 금 사슬로 싸여 있어.
난 궁금해. 여전히 궁금해.
누가 이 비를 멈출 건지.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들었어.
우린 얼마나 앙코르를 외쳤었던지
군중들은 우르르 모여들어 체온을 유지하려 애썼어.
하지만 비는 계속 퍼부어 내 귓가를 때렸어.
난 궁금해. 여전히 궁금해.
누가 이 비를 멈출 건지
언뜻 보면 비에 관한 노래일 뿐인 것 같지만 이 노래에서 말하는 ‘레인(rain)’은 ‘제발 총질 좀 그만해! 누가 이 미친 짓 좀 멈추게 해줘!’ 뭐 이런 뜻이다. 물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했던 때다. 현실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과 히피들이 세상에 대해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질렀던 때였다. 그런 민중의 분노를 담은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그러니 전형적인 반전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그저 비에 관한 노래인 줄로만 알고 당국이 이 노래를 금지곡 목록에 넣지 않았으니 고마운 것인지 웃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도 1971년 발표된 반전 노래였지만 당국의 무지 때문이었는지, 몇 곡 살려주자는 의식 있는 당국자의 배려였는지 금지곡 목록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금지곡을 만든 까닭이 궁금해진다. 노래는 사람들에게 강한 정서적 힘을 준다. 그것은 노래를 만든 사람들도 알고 권력자들도 안다. 노래의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권력을 동원해 노래의 전파를 막았을 것이다. 독재 권력은 자신들의 불의에 대한 풍자와 야유를 두려워한다.
노래는 풍자의 아주 좋은 시대적 장치다. 그게 고깝고 견디기 힘든 정권은 그만큼 자신들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난이 두렵다. 하지만 그게 막는다고 다 막아질까. 흐르는 강물의 한쪽을 막는다고 물이 막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노래로 억눌린 정서를 울분과 함께 쏟아낸다.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1980년대 학생과 민주화 운동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나
이제 야만적인 금지곡 폭력은 사라졌다. 그래서 이 노래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를 들을 때도 별 감흥이 없다. ‘바보 같은 놈들. 이게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고’라며 속으로 킬킬대며 웃던 유쾌함도 맛볼 일이 없다. 하지만 이 노래가 지닌 다양한 배경과 층위는 여전히 우리에게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전히 그 ‘레인(rain)’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만 생각하는 한…. 분명 이 노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 노래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 암울했던 기형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다음 여름에는 이 노래를 다른 뜻으로도 새겨 들어보자. 추악한 전쟁의 무모함과 야만성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다시는 자기들 멋대로 ‘금지곡’을 만들었던 만행을 되풀이하는 무모한 시대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김경집 인문학자, 전 카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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