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데이터’의 원형…인공지능 현실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네, 왕비님이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분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백설공주님이 왕비님보다 천 배는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알겠지만 유명한 동화 ‘백설공주’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게 중세 북유럽이 아니라 어느 미래 대도시에서의 이야기라면 어떻게 진행될까. “거울아, 거울아, 내 피부 트러블의 원인이 뭐니? 어느 성형 클리닉이 눈밑주름 제거 수술을 제일 잘하니?” “네 왕비님, 모낭충이 이상 증식하고 있고요 서울 강남역 X번 출구 모모 성형외과로 가세요.” 상세하고 정확한 답변에 흡족해진 왕비는 아마 오랫동안 해오지 않았던 질문을 날릴지도 모른다. “거울아, 그런데 지금까지 네 이름도 몰랐구나, 이름이 뭐지?” “네, IBM의 7세대 인공지능 의사결정 지원 웨어러블 미러, 왓슨 7세랍니다.”

이미 컴퓨터의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부터 수많은 지성들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이상을 품어 왔다. 그러나 오히려 인지과학·뇌과학 등 인간의 사고에 대한 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신경세포의 유기적이고 복잡한 아날로그 네트워크로 구성된 두뇌와 디지털 컴퓨터는 작동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민과 몰입을 거친 깊은 밤에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놀랄만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이른바 ‘퀄리어(qualia)’의 순간은 기계에 아직 요원하다.

하지만 인간이 담당해 온 일을 조금 다르게라도 더 잘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상당한 수준의 사고와 지식을 요하는 문제여도 그렇다. 이러한 스마트한 컴퓨터의 기술 개발의 중심에 선 기업 중의 하나가 바로 IBM이다.

IBM은 예전부터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기술 트렌드를 이끌어 온 주역 중 하나로서 기술력을 과시할 이벤트에 신경을 써 왔다.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199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간 체스 챔피언과의 대결을 벌인 ‘딥블루(Deep Blue)’였다.

1997년 5월 11일 당대 최고의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와 벌인 연속 대국에서 딥블루는 2승 3무 1패를 올리면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은 바 있다.


체스 대결 이어 퀴즈쇼에 도전
IBM으로서는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층 더 멋진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러던 2005년 IBM의 연구개발부문 총책임자였던 폴 혼이 떠올린 것은 바로 반 세기 동안 사랑받는 인기 퀴즈쇼 ‘제퍼디(Jeopardy!)’였다. 1000만 명에 이르는 시청자 앞에서 ‘인간 퀴즈왕과 대결하는 컴퓨터’. 콘셉트만으로도 누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에 자원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체스와 달리 방대한 질문에 답할 만큼 똑똑한 컴퓨터를 만들어야 했고 만에 하나 방송에서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회사가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로 지목된 인간 퀴즈왕은 무려 74회 연속 우승으로 317만 달러를 넘게 벌어들인 켄 제닝스(Ken Jennings)와 350만 달러를 벌어들여 역대 최고 상금왕 자리에 오른 브래드 루터(Brad Rutter)였다. 누가 보기에도 엄청난 리스크가 걸린 과제였다.

결국 2006년 폴 혼은 데이비드 페루치라는 인공지능 전공 팀장에게 이 일을 떠맡기듯 넘겨버렸다. 페루치의 팀은 개발 기간 3년을 목표로 ‘블루 제이(딥블루의 ‘블루’와 제퍼디의 머리글자 ‘J’를 합성)’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수많은 지식 데이터와 진정한 지능을 부여해 주는 수많은 통계적 분석 모형 및 판단 로직에 있었다. 개발진은 우선 디지털화된 각종 지식 데이터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위키피디아 전문은 물론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등을 통해 디지털화된 수많은 서적·문서·사전 등 총 4테라바이트, 2억 페이지 분량의 데이터가 모였다. 이와 함께 과거 제퍼디 기출 문제와 유사 퀴즈 문제들을 모아 출제 유형을 분석하고 질문에 들어맞는 해답을 추론하는 로직을 하나하나 테스트했다.

여러 난제 가운데 하나는 퀴즈쇼에 난무하는 인간 언어의 복잡 미묘한 의미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느냐였다. 대개 퀴즈쇼는 문제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함정을 심어 놓는다. 그리고 미묘한 위트와 말장난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 속에서 어떤 핵심 키워드에 집중해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CEO를 위한 테크 심포니] 인간을 꺾은 퀴즈왕 IBM 왓슨
문제는 여기에 끝나지 않는다. 긴박한 퀴즈쇼 상황에서는 버저를 빨리 누르고 먼저 답을 말하는 게 핵심이다. 번뜩이는 인간의 직관과 승부하려면 한 대의 컴퓨터로는 어림없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판단이 진행되는 병렬처리가 필수적이었다. 그 결과 이 시스템은 90개의 서버가 연결돼 중앙처리장치(CPU) 코어 2880개, 램 15테라바이트를 갖춘 거대한 슈퍼컴퓨터로 발전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시스템의 윤곽이 갖춰지기 시작한 2008년 12월 12일 연구진은 전설적인 IBM 창립자의 이름을 따서 이를 ‘왓슨(Watson)’이라고 명명했다. 왓슨은 이후에도 2년 넘게 본격 데뷔하기까지 수많은 연습 경기를 치르며 테스트를 반복했다.

드디어 2011년 2월 14, 15일 양일간 켄 제닝스, 브래드 루터와 왓슨이 겨루는 사상 초유의 인간 대 기계의 퀴즈쇼는 수많은 시청자 앞에 선을 보였다. 그리고 최종 결과는 제닝스가 2만4000달러, 루터가 2만1600달러, 왓슨은 7만7147달러를 벌어들였다. 왓슨은 제닝스에게 역전을 허용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인간 퀴즈왕에 비해 3배가 넘는 상금을 획득하며 당당히 우승한 것이다. 즉시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에는 “기계가 인간을 꺾다”라는 기사가 출렁였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지능을 조금이나마 다시 따라잡았다는 신호였다.


병렬 컴퓨팅과 구조화된 데이터 결합
퀴즈쇼 제퍼디에서 왓슨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극적인 우승은 우리 시대의 많은 변화를 함축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인공’지능이 과연 현실성과 유용성이 있을까’라는 오랜 의문에 대해 왓슨은 비로소 ‘그렇다’는 답을 보여 줬다. 기계는 인간의 번뜩임을 갖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연산과 훈련된 판단 로직을 통해 감정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는 판단 결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왓슨의 우승은 수많은 계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병렬컴퓨터 기술과 디지털화됐지만 구조화는 덜 된 인간의 방대한 지식 데이터, 즉 빅 데이터가 동시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빅 데이터’라는 용어가 2011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2011년 벽두의 겨울을 뜨겁게 달궜던 왓슨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똑똑한 답을 내려 주는 왓슨의 기술은 조금씩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의료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잘못된 진단과 처방, 이에 따른 의료사고 위험을 덜어주는 임상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CDSS)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기에도 바쁜 의사와 간호사들은 나날이 늘어가는 최신 의료 지식과 현장에서 이뤄진 임상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식을 흡수해 사회자의 퀴즈에 답했듯이 병원 현장의 의료 지식을 흡수해 상황에 맞는 최적의 처방을 제안하는 임무에 왓슨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IBM은 미국 제2의 유명 암 전문 클리닉인 슬론-케터링 암센터와 미국 최대의 민간 의료보험사 웰포인트와 함께 폐암 진단 및 처치 지원 시스템을 개발해 이를 출시하는 단계까지 발전시킨 바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각종 애프터서비스 문의나 민원 사항들을 콜센터를 통해 인간 상담원에게 토로하고 답을 받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전 세계 수많은 기업에 쏟아지는 2700억 건에 달하는 고객 문의 가운데 50%는 제대로 답변이 이뤄지지 못해 불편과 짜증을 초래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IBM은 왓슨의 기술을 이용해 이런 고객들의 질문에 자동적으로 답변해 주는 ‘왓슨 인게이지먼트 어드바이저(Watson Engagement Advisor)’도 개발 중이며 여러 기업들이 이러한 시스템 도입을 추진 중이다. IBM은 왓슨을 이용한 다양한 응용 솔루션 시장이 2015년에는 16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머지않아 우리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모니터 한 구석에서 의사에게 조언하는 왓슨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하우스(House)’에서 갖은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정적인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가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고장 난 제품에 짜증을 내고 무심결에 전화를 건 콜센터에서 때로는 20대 아리따운 여인 같은, 때로는 50대 중년 남성 같은 목소리의 답변을 들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왓슨의 목소리인지도 모른 채…. 왓슨과 같은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기술의 발달이 더욱 정확한 정보를 얻고 냉철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축복인지, 여남은 인간의 일자리를 마저 치워버릴 재앙일지의 판단은 아직 잠시 접어두자. 세상의 거대한 기계들이 인간의 근육을 대신했어도 아직 수많은 할 일이 남아 있듯이 왓슨에게 우리의 사고 기능 일부를 맡기더라도 남아 있는 무궁무진한 새로운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