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혜 여행 작가

여느 날처럼 엄마를 도와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할 시간이었다. 딩동.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아! 나의 아버지] 가족 울타리를 넓힌 큰 사랑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무표정한 듯 담담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아버지는 어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현관문으로 들어선 그 아이는 힙합 바지에 짧고 덥수룩한 머리, 선머슴 같은 외모의 내 또래 아이였다.

“들어와라. 혜정아. 오늘부터 네가 지낼 집이야. 식구들에게 인사해.”

오붓한 우리 가족의 식사 시간은 깨진 게 분명했다.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자초지종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통보였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청소년 보호 기관에서 맡았던 아이였다. 부모 없이 엇나간 아이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고 이후 친인척이나 보호 시설이 나타나면 그 품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했다. 동료 가족들 중엔 이 아이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불쌍히 여긴 아버지는 가족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반항하기 시작했다. 외동딸로 크면서 제 것을 누군가에게 나눠 본 적이 없던 나는 하루아침에 생긴 동갑내기 자매를 쉽게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내가 아끼던 오디오도, 학용품도 나눠야 했다. 엄마는 내 옷이 아닌 그 아이 옷을 먼저 골라 사 입혔다.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도 둘로 나눠야만 했다. 나눠가져야 할수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깊어만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애증의 감정이 생겨나고 마침내 한솥밥 먹는 가족의 정이 들 무렵 혜정이와 나는 이별의 날을 맞았다.

우리가 헤어진 곳은 대전이었다. 혜정이의 먼 친척이 사는 곳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지로 찾아간 대전엑스포…. 놀이기구를 신나게 타며 우리는 지난 1년을 말없이 곱씹었다. 어렸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그 아이의 외로움, 나를 향한 부러움·미움·고마움 그리고 가족의 사랑 말이다. 그 후로 그 아이의 물건은 고스란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어딘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짐 정리를 하던 내게 아버지는 다가오셨다.

“그간 마음고생 많았지? 한창 사춘기를 겪을 예민한 시기일 텐데 아버지가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지혜야. 어려운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사람 사는 도리가 아니란다. 너는 엄마 아빠 품에서 따뜻하게 지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세상엔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많아. 혜정이는 평생 우리 가족을 고맙게 생각하고 널 기억하지 않겠어?”

노인한글학교, 고아원·양로원 봉사, 청소년 선도, 출소자 계몽 활동…. 이것은 아버지가 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이전까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따라다녔던 일요일 봉사 활동으로 나는 충분히 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족의 울타리를 넓혀 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진짜 아버지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오신 아버지. 대가를 바라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 세상에 통했던지 정부는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그 빛나는 훈장을 가슴에 달던 날, 아버지는 보상받았다는 자랑스러움보다 모진 세월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의 마음을 더 다독였을지 모른다. 17년 전 그날, 아버지가 내게 주려고 했던 선물의 뜻을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