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적자생존 게임…스피드가 경쟁력
최근 중국에서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의 공장으로 불린다.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는 전 세계의 하청업이 가장 잘 발달해 있는 지역이다. 포천을 비롯해 각종 비즈니스 잡지와 경제 신문들은 중국 기업들이 글로벌 랭킹에 진입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인프라·자원·금융업 등 국가의 보호를 받는 산업들에 소속된 몇 안 되는 초대형 기업집단보다 저임금에 기초해 기술력을 키워 온 제조업체가 한국 기업들에는 훨씬 더 두려운 존재다. 하루가 다르게 시장 지배를 넓혀 가는 중국 기업들은 과연 어디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전통적인 ‘기술의 사다리’ 이론
해외투자 이론의 선구자인 스티븐 하이머(Stephen Hymer, 1934~1974년)는 제품 기술은 선진국에서 개발돼 충분히 소비된 후 선진국에서의 과잉공급 경쟁으로 마진이 낮아지면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도국으로 제품 기술이 이전된다고 말했다. 앨리스 앰스덴(Alice H. Amsden, 1943~2012년)과 추(Wan-wen Chu)는 대만에서의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2003년 출판한 저서 ‘후기 경제발전을 넘어서(Beyond Late Development)’에서 이렇게 제품 기술의 해외 이전 과정에서 개발도상국의 기업들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더 큰 가격 경쟁력을 제시할 수 있는 다른 국가의 기업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기업들은 (망하기 전까지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려는 레이스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말했다. 이른바 앞에서는 특허로 무장한 선진국 기업들이 달리고 있고 뒤에서는 저임금을 바탕으로 추격해 오는 중국 기업이 있기 때문에 대만 기업들에는 하루라도 빨리 제품 기술을 확보해야만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는 제품의 마진에서 최대한 유리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그림 1 참조). 이렇게 보면 개도국에서 스피드는 엄청난 경쟁력이 된다.
![[경영전략 트렌드] 글로벌 생산 시스템에서 진화하는 중국 기업](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483311.1.jpg)
중국에서도 기업 간 생산 시스템에서의 위치가 계속 분화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전·통신 제품의 경우 중국 내에서 제조된 제품은 기술력을 갖추면서 글로벌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많이 들어본 하이얼·TCL·화웨이·레노보 등 중국의 간판 기업은 선진국의 선두 기업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연구·개발(R&D)에 열을 올리고 이들에게 납품하는 하청업체나 그 하청업체들에 다시 납품하는 2차 하청업체들은 보다 이른 시간 내에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제품 개발력을 획득하는 게 목표다.
경제 개혁의 시작과 함께 중국은 외자 기업에 시장을 내주고 그 대가로 기술이전을 요구해 왔다. 기업 내부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역사가 오래된 한국과 달리 중국 기업들은 오랫동안 대부분이 합자(조인트벤처)나 라이선싱을 선호해 왔다. 예를 들면 현재 휴대전화를 제조하는 중국 기업들은 홍콩에서 세워져 대륙으로 넘어온 기업을 제외하면 이들의 성장 패턴은 국유 기업 출신으로서 가전·컴퓨터 및 그 부품, 텔레비전을 생산했던 경험이 있다<표 1 참조>. 그리고 외국 기업의 합자 파트너로서 생산기술을 이전받아 제조를 시작한 후 자체적으로 연구·개발 역량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스피드의 덫에 걸린 기업들
필자는 2000년에 이스트콤 관계자들을 인터뷰했었는데 그때 이스트콤은 모토로라의 하청업체에서 갓 탈피해 OBM의 걸음마를 뗀 단계였다. 당시 무선 휴대전화가 막 보급되기 시작된 시점에서 중국의 휴대전화 시장점유율 톱 10위 안에 랭크됐던 유일한 중국 기업이다. 중국에서 자본주의에 가장 가까운 경영 환경을 제공하는 항저우라는 지역에 베이스를 두고 있고 저장대라는 명문 대학 덕택에 우수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상하이라는 거대 소비도시를 배후지로 끼고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자신감에 차 있고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이 기업을 필자는 2005년에 다시 방문했다. 2005년 이스트콤은 OBM을 포기하고 제품 디자인 역량도 쇠퇴해 특별한 경쟁력이 없는 하청업체가 되어 있었다. 필자는 성장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물었고 기업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국유 기업인데, 예전에는 연구소 중심으로 시장의 변화에 따라 빨리빨리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몸집이 작아 대규모 물량을 제조할 수 없어 제품과 회사의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해외시장에서도 매출이 많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이러한 인지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 지역의 부품업자·장비업자·기술연구소 등을 합병, 기업집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덩치가 커져 생산량이 늘어나니 생산 단가가 낮아졌지만 기업 내에서 의사결정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더군다나 각 조직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문화도 달랐기에 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해도 성공하지 못하거나 진도가 더디게 진행됐다. 결국 제품을 개발했을 때는 이미 그 제품이 시장에서 한물간 제품이 되어 버렸고 시장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우리의 시장 내 입지는 계속 좁아졌다.”
![[경영전략 트렌드] 글로벌 생산 시스템에서 진화하는 중국 기업](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483312.1.jpg)

THE WORLD IS FLAT: 혼란 그리고 기회
중국 기업들을 만나보면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규모가 큰데도 의사결정 과정이 신속하고 기업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빠른 점에 대해 굉장히 부러워한다. 예를 들면 화학 계열사와 전자 계열사를 소유한 대기업이 R&D에서 R(Research: 기초 연구)는 화학 계열사에 맡기고 R가 끝나면 D(Development: 기초 연구를 바탕으로 상용화를 위한 개발)는 전자 계열사가 이어 계속 진행하고 해당 기술의 R&D가 완성되면 필요한 자회사에서 생산하고 기술적 문제가 있을 때는 관련된 작업을 맡았던 계열사에서 지원한다. 기업 내부에서 기술 혁신 프로세스가 이렇게 원활하게 이뤄지면 기업 간 경쟁에서 기술의 사다리를 더 빨리 오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만약 완성품 업체가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기업은 어디일까. 전자 산업의 글로벌 생산 시스템에서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기업은 핵심 부품인 칩을 납품하는 회사들이다. 핵심 기술은 이들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하청업체에 있다. 이들이 칩을 공급하면서 많은 기술적 지식이 이전된다. 대형 기업집단과 전문 하청업체가 아닌 무수한 중소 제조업체가 제품을 가장 낮은 비용에 디자인할 수 있는 방법은 모방이다. 중국 ‘짝퉁’ 혹은 패러디 제품을 지칭하는 산자이(山寨)에 대해 문화적 접근 등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생산 시스템에서는 0의 비용으로 제품 디자인을 얻는 행위로 풀이된다. 산자이 폰으로 음지에서 추격의 트랙에 올라타 양지로 나와 정식으로 제조하고 시장점유율을 올리는 기업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생산 시스템이 글로벌하게 발달하기 전에는 오로지 선진국 기업들만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포천을 비롯해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에서도 자국 기업을 글로벌 기업의 리스트에 올리고 있다. 선진국만 누려 왔던 국가의 부가 재배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과거와 달리 추격의 양상도 훨씬 복잡해졌다. 중국에서는 그 어느 국가보다 많은 기업이 하루가 다르게 기술력을 향상시키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단시간에 이뤄내야 하기 때문에 시장을 주도하지 못하고 시장의 변화에 리드당할 때도 많다. 그러나 결국 시장의 변화에 적응하고 기술력을 ‘빨리’ 쌓은 기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중국은 현재 적자생존의 과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곽주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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