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연·기금의 투자 혁명 - 저성장과 고령화 파고 넘는다 ④ 미국 캘퍼스

캘퍼스(CalPERS)는 미국 최대 연·기금이다. 1980년대 주주 행동주의의 깃발을 처음 치켜들어 금융시장에 파란을 몰고 왔다. 환경과 사회를 고려한 투자,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지금도 캘퍼스의 트레이드마크다. 2007~2008년 미국 주택 시장 붕괴와 금융 위기 여파로 펀드 자산의 4분의 1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위기를 겪었지만 이들의 지속 가능 투자(Sustainable Investment) 원칙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SPECIAL REPORT] 주주 행동주의의 진화…위기 딛고 화려한 부활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1시간 반쯤 달리면 캘리포니아 주도인 새크라멘토가 나온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과 교육공무원, 지방 공공 기관 공무원 170만 명에게 은퇴연금과 의료보장 혜택을 제공하는 캘퍼스(CalPERS)는 새크라멘토 시내 한복판 4개 블록을 차지한 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1986년에 지어진 링컨 플라자 노스는 피라미드 형태의 6층 건물이다. 건물 4면의 테라스에 각종 식물과 나무가 심어져 거대한 숲을 연상시킨다. 링컨 플라자 웨스트와 이스트는 2005년 완공돼 좀 더 현대적인 디자인이다. 4번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들어선 쌍둥이 빌딩은 3층과 4층이 서로 연결돼 있다.

캘퍼스는 1932년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들을 위한 연금으로 처음 출발했다. 1939년 공공 기관과 지방정부 공무원까지 가입 대상이 확대되면서 덩치가 커졌다. 2013년 6월 말 기준으로 2579억 달러(약 277조 원)의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연·기금 중 여섯 번째 규모다. 국제금융계에서 캘퍼스의 위상은 이러한 외형 순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운용 자산의 절반을 국내외 주식에 쏟아붓는 공격적인 투자 스타일로 명성이 높다. 세계 금융시장을 주무르는 큰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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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퍼스는 주법에 따라 설립된 캘리포니아 주정부 기관 중 하나지만 독립된 이사회에 의해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이사회는 가입자 대표 6명을 포함해 모두 13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주 재무 감독관과 재무장관, 인적자원국 국장, 인사위원회 위원장이 당연직 이사로 들어가고 주지사가 2명(지방정부와 보험 업계에서 각각 1명씩), 주 의회 하원의장과 상원 운영위원회가 공동으로 1명의 이사를 지명한다.


매월 열리는 이사회 인터넷 생중계
지난 9월 15일 링컨 플라자 노스에 자리한 강당 주변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매월 한 차례씩 열리는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다. 통상 이사회는 3일 동안 이어진다. 첫날은 투자위원회, 둘째 날은 연금 및 의료보장위원회, 셋째 날은 관리이사회가 개최된다. 회의 자료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사회 현장이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회의가 끝나면 유튜브에도 동영상을 올린다. 물론 회의 내용을 100% 공개하지는 않는다. 일부 비공개 세션이 있지만 극히 제한적이고 이 역시 토론 주제와 참석자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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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리먼브러더스 파산 5주년 다음 날 열린 첫날 회의에서 조셉 디어 캘퍼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리먼브러더스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이후 이어진 글로벌 금융 위기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를 통해 캘퍼스는 3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5년 전 터진 위기는 세계 연·기금의 롤모델로 불리던 캘퍼스마저 벼랑 끝 위기로 몰아넣었다. 미국 주택 시장 붕괴와 주가 급락으로 2008 회계연도(2007년 7월~2008년 6월) 수익률이 마이너스(-4.9%)로 주저앉은데 이어 2009 회계연도에는 마이너스 23.4%라는 충격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불과 2년 만에 보유 기금의 4분의 1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산이 쪼그라들면서 2009년 세계 4위 연·기금 타이틀을 한국의 국민연금에 내주고 5위로 내려앉았다. 캘퍼스 이사회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고경영자(CEO) 교체를 선택했다. 새로 임명된 앤 스터스볼 CEO는 UC데이비스 로스쿨을 졸업한 법률가 출신으로 캘퍼스 77년 역사상 첫 여성 CEO다.

캘퍼스는 위기 속에서도 50%가 넘는 주식 투자 비중을 줄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주식에 대한 투자가 수익률이 가장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2010 회계연도에 14년 만에 가장 높은 21%의 수익률로 극적인 반전에 성공한 것도 주식 덕분이었다. 당시 캘퍼스는 주식에서 3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디어 CIO가 꼽은 3가지 교훈은 꼬리 리스크와 조직 적합성, 캘퍼스의 본질과 목적 등이다. 꼬리 리스크는 금융시장에서 발생 가능성이 희박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투자 포트폴리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험을 뜻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를 계기로 금융시장에서는 꼬리 리스크를 사전에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벌어지고 있다. 디어 CIO는 “꼬리 리스크는 현실”이라며 “리스크를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할 때 항상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어 CIO는 ‘파도가 빠져나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는지 드러난다’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의 말을 인용하며 “이 말은 캘퍼스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는 위기를 통해 드러난 많은 문제들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어 CIO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캘퍼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연금 가입자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게 머무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투자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부침 속에서도 살아남아 장기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0년 말 캘퍼스는 주식·채권·대체투자 등으로 나누던 전통적인 자산 구분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분류법을 채택했다. 변동성이 커진 시장 조건을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캘퍼스는 투자 자산을 성장 자산과 소득 자산, 실물 자산, 인플레이션 자산 등 4개 그룹을 나눈다. 2012년 6월 기준으로 성장 자산에 63.1%(주식 48.5%, 사모 투자 14.6%), 소득 자산에 23.3%(채권 21.4%, 단기 투자 1.9%), 실물 자산에 10.6%, 인플레이션 자산에 3%를 투자한다.

캘퍼스는 은퇴자들에게 매월 평균 2629달러의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연금 수급자들에게 지급되는 1달러 중 21센트는 주정부 등 고용주가 부담하고 13센트는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에서 나온다. 나머지 66센트를 투자 수익으로 채워야 한다. 캘퍼스가 투자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80년대 주주 행동주의를 처음 내건 것도 건전한 기업 지배 구조와 투명성이 실적 개선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캘퍼스는 1984년 기업 지배 구조 개혁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주주 행동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1987년부터 미국 대기업들을 벌벌 떨게 한 ‘포커스 리스트’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실적이 저조하고 지배 구조에 문제가 많은 기업들은 선별해 공개적으로 변화를 압박하는 방식이다. 매년 6월 5~10개의 문제 기업 리스트를 공개하고 다른 기관투자가들과 연대해 주주 제안, 이사 선임 등 적극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캘퍼스로부터 경영진 교체와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요구받은 기업들의 지배 구조가 개선되면서 주가도 올라 ‘캘퍼스 효과’란 용어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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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 연·기금들이 앞다퉈 포커스 리스트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지만 캘퍼스는 2010년 말 이 방식을 포기했다. 캘퍼스의 새 전략은 ‘공개적인 망신 주기’보다 기업과의 개별적인 접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롭 페크너 캘퍼스 이사회 의장은 “포커스 리스트는 그동안 최악의 시장 플레이어들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며 “하지만 이제는 좀더 효과적인 접근법을 찾아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지배 구조를 개선했고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주주들의 이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망신 주기’에서 개별 접촉으로 전환
캘퍼스의 새로운 접근법은 투자 컨설팅사 윌셔의 연구 결과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회사는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캘퍼스의 포커스 리스트에 오른 169개 기업의 수익률을 추적했다. 이들은 3년 기준으로 벤치마크 지수를 11.59%(누적 수익률) 웃돌았고 5년 기준으로는 4.77% 초과 수익을 올렸다. ‘캘퍼스 효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사 대상 기업을 공개적으로 포커스 리스트에 올려 발표한 기업(59개)과 포커스 리스트에 선정됐지만 공표하지 않고 기업과 개별 접촉을 통해 개선을 이끌어 낸 기업(110개)으로 나누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윌셔의 분석에 따르면 캘퍼스가 개별적으로 개입한 기업이 공개적으로 개입한 기업의 수익률을 분명하게 앞지른다. 공개 개입 기업은 처음 2년 동안 주가에 큰 변화가 없는 반면 개별적으로 개입한 기업은 개선 요구를 훨씬 빨리 받아들이고 주가도 더 빨리 움직인다.

캘퍼스는 2010년 이후에도 포커스 리스트를 선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이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캘퍼스가 최근 관심을 기울이는 이슈는 이사 선임과 관련한 과반수 득표제 도입이다. 미국 기업 중 상당수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출할 때 과반수 득표가 아니라 최다 득표 방식을 적용한다. 최다 득표제는 주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캘퍼스의 판단이다. 최악의 경우 단 1표의 찬성표를 얻은 후보가 이사가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사 선출 시 주주들의 과반수 득표제를 강제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2010년 캘퍼스는 최다 득표제를 유지하고 있는 38개 기업에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2011년에는 56개 기업에 이 이슈를 제기했다. 캘퍼스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과반수 득표제는 미국 주요 기업의 규범으로 빠르게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 중 80% 이상이 과반수 특표제를 도입했다.

올 초 캘퍼스는 애플 주총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2011년 처음 과반수 득표제 도입을 애플에 요구하고 다른 기관투자가들과 연대해 행동에 나선 결과다. 캘퍼스는 2011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주주총회에 이 안건을 올렸다. 올해 주총에서는 한국 국민연금도 캘퍼스와 함께 과반수 득표제 도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애플은 캘퍼스의 압력이 거세지자 기업 투명성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국가별 매출 내역을 주주들에게 공개하고 회계 정보의 공개 수준도 높였다.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미국)=글·사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