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지혜 필요…‘하면 된다’ 생각 버려야

'선조실록’ 8권에 용례 박계현이 아뢴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공자도 ‘주역’을 읽으면서 위편이 세 차례나 끊어졌었고 또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글을 어찌 시원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나무껍데기·마·넝마·헌 어망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낸 건 서기 105년쯤이다. 당시는 역사적으로 한(漢)나라가 재건된 후 5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통일 왕조로서 기초가 다져진 때였으므로 정치·문화적 필요에 따라 기록을 위한 재료가 많이 쓰이고 있던 때였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대나무를 잘라 글을 써 책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을 죽간(竹簡)이라고 하는데, 공자가 어찌나 책(그게 바로 ‘주역’이었다)을 많이 읽었는지 그게 세 번이나 끊어졌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 ‘공자만이희역 독역 위편삼절(孔子晩而喜易 讀易…韋編三絶)’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한 권의 책을 몇 십 번 거듭해 읽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공자가 학문을 사랑하는 정신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도 젊어서 혈기왕성할 때가 아니라 만년에 그랬으니 대단한 일이다.


무엇을 자르고 갈 것인지 먼저 결정해야
우리 교육은 엄청난 지식을 벽돌 올리듯 무한정 쌓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냥 쌓기만 해서는 정작 필요한 벽돌을 빼내 쓰기가 어렵다. 그리고 꺼내 쓸 생각도 못한다. 오로지 텍스트 추종에만 열을 올린다. 많은 벽돌을 쌓아 둔 사람이 대접받는다. 콘텍스트를 생성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지식만 있고 정보에 대한 탐색을 훈련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오늘날 정보는 차고 넘친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에서 검색창에 단어만 두드리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정보에 그칠 뿐 지식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위편삼절이 구체적으로 책을 다루고 있다면 그보다 넓은 뜻으로 쓰이는 게 바로 절차탁마(切磋琢磨)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덕행을 갈고닦음을 비유한다. 톱으로 자르고(切), 줄로 쓸고(磋), 끌로 쪼며(琢), 숫돌에 간다(磨)는 낱말들의 조합이다.

절차탁마란 원래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숫돌에 간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수양뿐만 아니라 기술을 익히고 사업을 이룩하는 데도 인용된다. ‘대학’에 보면 “…여절여차자 도학야 여탁여마자 자수야(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자르 듯하고 쓸 듯함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요, 쪼 듯하고 갈 듯함은 스스로 닦는 일이다)”라고 하여 절차는 학문을 뜻하고, 탁마는 수양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언변과 재기가 뛰어난 자공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여쭸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자공의 물음에 공자가 대답했다. “좋긴 하다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다.” 공자의 대답을 듣고 자공이 다시 여쭸다. “‘시경(詩經)’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를 잘라 줄로 간 것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처럼 빛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양에 수양을 거듭해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자공의 진지한 물음에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자공아, 이제 너와 함께 ‘시경(詩經)’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구나.” 바로 공자의 이 대화에서도 절차탁마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다. 절차탁마와 와신상담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둘 다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목적과 태도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와신상담이 원수를 갚기 위해 수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처절한 자기반성과 수련이라면 절차탁마는 바로 자신에 대한 부단한 노력을 뜻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 하기 전에 할 일
뭐든지 하면 된다는 건 망상이고 착각이다.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다.


그런데 무엇을 자르고 쓸며 쪼고 갈아야 할까. 그저 자르고 간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걸 먼저 분별해야 한다. 옥이 아닌 돌을 무작정 골라 그냥 자르고 갈아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공자의 위편삼절이나 공자가 자공에게 말한 절차탁마는 모두 학업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대상과 목적이 정해진 것이고 남은 건 부지런히 수학해 깨우치는 것이다. 하지만 학업이 아닌 일은 그보다 더 신중해야 한다. 절차탁마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석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랫사람을 그저 갈고닦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가 지닌 잠재력과 관심, 그리고 지향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살핀 뒤 밑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정해진 틀에 붓거나 그 틀에 맞춰 여기 자르고 저기 도려내 원하는 꼴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하지하책(下之下策)일 뿐이고, 그야말로 꼴값만 떠는 꼴이다.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 절차탁마에 앞서야 하는 건 관심과 지혜다.

그저 열심히 갈고닦으면 뭐든 다 이룰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도 버려야 한다. ‘하면 된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표어가 한국인의 불굴의 추진력을 상징하는 말이고 그 힘으로 이만큼 성장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안 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건 망상이고 착각이다.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가.

하나의 목적이나 목표를 정해 계속해 파고들어가는 건 전형적인 수직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실질적 대안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꺼내 드는 카드일 뿐이다. 물론 모든 걸 다 걸고 매진하면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노력과 능력으로 훨씬 더 값진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분명 이뤄낸 게 있었기 때문에 그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큼 미련스러운 일은 없다. 도저히 이뤄질 수 없다고 여겼던 걸 마침내 성취했을 때의 그 감격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마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 목표를 이뤄 내기 위해 치른 값이 생각보다 훨씬 클 때가 많다. 이뤄낸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성취의 이면에 있는 희생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반드시 한 세트일 필요는 없다
위편삼절이나 절차탁마에 버금가는 말 가운데 철연(鐵硯)의 고사도 있다. 오대(五代) 진(晉)의 상유한(桑維翰)이 쇠로 벼루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벼루가 뚫어지면 내가 다른 길을 통해서 벼슬을 하겠다.” 자신의 본업을 쉽게 바꾸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견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고대의 인물 가운데 대단한 의지와 일관된 실천을 몸소 보여준 이들이 많다. 그만큼 당대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각가나 세공사가 원하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르고 쓸며 쪼고 갈아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언제나 그런 작품을 추구하고 원하는 건 아니다. 일과 목적에 따라 잘라내기만 하거나 갈아야 할 때도 있다. 때론 자르고 쪼는 일이 있고, 때론 쓸며 갈 일이 있다. 그러니 절차탁마가 반드시 한 세트는 아니다. 오히려 대상과 목적에 따라 네 개의 경우의 수 가운데 잘 골라내 조합해야 한다. 그런데도 개인이건 경영자건 그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해치우려고 든다. 그러다 보면 멀쩡한 것도 갈아서 없어지게 하고 쪼아서 못 쓰게 만들기도 한다. 무조건 들이대고 질러댄다고 해결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차분하게 그 대상에 대해 깊이 있게 오랫동안 생각부터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