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재해석

고만고만한 세력들끼리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울 때 춘추전국시대니 어쩌니 하는 표현을 쓴다. 그래서 우리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에서 투쟁과 경쟁과 같은 긴박감을 먼저 느낀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제자백가의 활력을 질식시킨 진시황제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의 덩어리 시간이 아니라 둘로 나뉜 것인데 성격이 비슷하고 시기도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아 편의적으로 묶어 부르는 것일 뿐이다. 춘추시대는 당시 종주국이었던 주(周)왕조가 이민족에 의해 수도를 옮기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각지의 제후들은 종주국인 주나라를 명목상으로만 받들 뿐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된 시기다. 즉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부터 한(韓)·위(魏)·조(趙) 등 세 성씨가 진나라를 분할해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 그러니까 기원전 770~403년까지의 기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를 어느 정도 떠받들어 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주왕조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해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하극상과 약육강식이 일상사가 되었다. ‘춘추’라는 말은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 역사서인 ‘춘추(春秋)’에 이 시대의 일이 대부분 실려 있어 유래했다. 즉 ‘춘추’에 이 시대가 기술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에 비해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한다. 전국이라는 말은 한나라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했다. 이 시대에는 전쟁이 그야말로 일상사였을 뿐만 아니라 규모와 기간도 춘추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됐다.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됐고 당연히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는 껍데기뿐이었다. 그 와중에 행세깨나 한다는 제후들은 앞다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뻐겼다. 그러니 중국 전체는 혼란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싸움질하는 나라들의 시대’라고 불렀을까. 춘추전국시대는 종전 170여 제후국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리는 7개국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정리될 정도면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간추려 여러 국가들의 일화를 담은 책이 ‘열국지(列國誌)’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시기야말로 중국의 사상, 더 넓게 말하면 동양 사상이 가장 만개했던 시기였다. 놀랍지 않은가. 전쟁과 학문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둘이 병행했을까. 이 점이 바로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질적인 차이다. 서양의 왕들은 그저 싸움만 잘하면 그만이었지만 동양의 군주와 제후들은 높은 식견과 학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학문이 발달한 게 그저 학문의 순수한 융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학문의 공존은 분명 매우 특별하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깐 시대를 건너뛰어 진(秦)과 한(漢) 왕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일 제국은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황제의 진나라에 의해 전국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것은 본격적인 의미의 제국 중국의 선언이었다. 황제는 통일 제국을 세운 뒤 사상의 통일도 요구했다. 통치자로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전까지 뒤엉켜 온 제국(諸國)들을 하나의 단일 제국(帝國)으로 바꿔 놓았으니 당연히 정치철학도 하나의 가치와 이념으로 묶을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어떤 사상이 그의 통치 이념에 가장 적합한지 검토했을 것이다. 유가(儒家)와 법가(法家)가 마지막 저울에 올랐다. 사실 그는 이미 법가의 도움을 받았다. 일찍이 상국(相國) 상앙(기원전 338년)을 통해 국내 개혁을 달성하고 부국강병의 틀을 마련했던 진나라로서는 당연히 법가에 끌렸다. 게다가 시황제 자신이 매료됐던 한비자(기원전 233년)와 진나라 통일 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기원전 210년)는 진나라의 통치 이념의 주인공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결국 시황제의 진나라는 법가를 택했다.

법가는 획일적 사회통제를 강력하게 천명했고 그러한 억압적 법치 노선을 비판할 사상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러던 차에 전국의 유생들이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나서며 봉건제를 부활시킬 것을 촉구했다. 시황제가 처음부터 유생들을 억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부쳤다.


“ 다양한 중국의 사상, 더 나아가 동양 사상의 만개는 역설적으로 서로가 대등하게 힘을 겨루던 상황에서 가능했다. ”


하지만 문제는 승상 이사였다. 법가의 선봉장인 이사는 차제에 걸림돌이 되는 라이벌 유가를 완전히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통치 이념에 맞서는 일체의 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이중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진나라 이외의 책은 모두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황제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분서(焚書) 사건이었다. 사실 모든 책을 불태운다는 칙령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금서를 소지하면 대죄로 몰아 치죄하겠다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책을 감추고 숨겼다.

문제는 그 다음 해에 터졌다. 황제의 불로장생약을 구한다며 황제를 꼬드긴 방사(方士) 노생과 후생이 거금을 빼돌리고 오히려 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도주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엉뚱하게 함양의 유생 460여 명을 잡아다가 생매장했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였고, 앞서 책을 불태운 것과 묶어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치욕적 사건으로 회자됐다.


실력 본위로 경쟁이 이뤄졌던 시대
통일 제국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사상의 표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유가를 억압에서 풀어낸 건 한(漢)나라였다. 기원전 191년 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 즉 협서율(挾書律)을 폐지함으로써 유가의 숨통을 터 줬다. 더 나아가 한 왕조는 결국 유가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중국은 이후 내내 유가의 전통만 고수하게 됐다. 중국은 그렇게 ‘공자의 나라’가 된 것이다. 한나라도 자신들의 통일 제국을 위해 하나의 사상만 선택하고 허용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중국의 사상, 더 나아가 동양 사상의 만개는 역설적으로 서로가 대등하게 힘을 겨루던 상황에서 가능했다. 제국(帝國)은 획일화를, 제국(諸國)은 다양화를 지향했다. 춘추전국시대야말로 중국 사상의 집대성이었고 제국의 통일 이후 단 한 차례도 그 부활은 없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거대한 사상의 오케스트라와 교향곡이었다. 다양하고 수많은 학자와 학파들이 전국시대에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쳤던 것이 중국을 버티게 한 힘이 됐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주(周) 왕조의 가족제가 붕괴되고 기존의 체제와 질서가 붕괴되면서 혈연 위주에서 벗어나 실력 본위를 지향한 사회적 혼란이다. 혼란이 무질서와 파괴로 이어지는 것은 재앙이지만 새로운 질서와 사상의 추구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일 수 있다. 그 매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따른다. 새롭고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가능하게 만드는 반성적 동의다.

또한 백가쟁명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학자와 재사들이 자기의 학설이나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신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패권을 차지하려는 제후들의 소망과 이들 사상가들의 결합은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와 사상의 가장 대등한 관계를 만들었다.

제후들은 유능한 인재를 끌어 모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를 꿈꿨고 학자와 선비를 우대하고 양성했다. 학자들 또한 주유천하하면서 여러 제후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설파하면서 서로의 궁합을 쟀다.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거나 제후의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났다. 다양성은 바로 그런 자유로운 사상의 출현과 성장의 가능성을 마련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