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부는 훈풍
전통적으로 8월은 유럽 대도시들이 텅 비는 바캉스 시즌이다. 불황 탓에 바캉스를 포기하는 이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지중해 등 인기 휴양지를 찾는다. 황금빛 해변에 누워 한 달 내내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유럽인들은 갑자기 쏟아진 뜨거운 관심에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유럽 경제가 바닥을 치고 회복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를 감지한 투자자들이 발 빠르게 구대륙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글로벌 투자회사들이다.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은 유럽의 전후 최장기 경기 침체가 끝났다며 유럽 투자 비중을 대폭 끌어올렸다. 이 회사는 지난 몇 달 동안 국제 금융사들이 투자 기준으로 삼는 대표적 지표인 ‘MSCI 세계 지수’보다 유럽 주식 비중을 4% 정도 높여 왔다. 그런데 긍정적 경제지표가 잇따라 나오자 지난 7월 이를 다시 8%로 상향 조정했다. 구체적인 시기와 강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유럽의 경기 회복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 회사는 미국에 비해 50% 정도 저평가된 유럽 에너지와 제약 회사 주식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JP모건도 유럽 비중을 늘린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금융 완화 정책이 지속되면서 유럽이 재정 위기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JP모건은 신흥국에 대한 투자 비중을 계속 줄여가는 대신 선진국에 대한 투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확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메릴린치가 8월 초 50여 개국 229명의 펀드매니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는 유럽 재평가 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유럽 지역 펀드매니저 88%가 연내에 유럽 경제가 개선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전달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유럽중앙은행(ECB)의 개입보다 강한 성장이 유로존 부채 위기 극복의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의견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응답자 20%가 12개월 내에 유럽 투자 비중을 늘리겠다고 답했다. 6년 만의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미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답한 펀드매니저도 17%나 됐다.
유로존, 2분기 성장률 0.3%
유럽 부활에 베팅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한국 투자자들도 자금 대이동에 가세했다. 지난 8월 6~13일 1주일 동안 유럽 주식형 펀드에만 227억 원이 유입됐다. 일본(84억 원)과 북미(54억 원)를 훨씬 앞지르는 액수다. 반면 중국(-588억 원)과 글로벌 신흥국(-205억 원)에서는 자금이 대거 이탈했다. 투자의 중심이 신흥국에서 유럽 등 선진국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유럽 기업 중에는 숨은 보석이 즐비하다. 천문학적인 부채에 짓눌린 각국 정부와 달리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곳이 적지 않다. 이들은 현금 보유율이 높고 배당도 적극적이다. 미국과 달리 대기업들이 내수보다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것도 강점이다. 유럽 상장 기업들은 매출의 거의 3분의 1을 신흥 시장에서 벌어들인다.
유럽 증시는 아직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다우지수는 2007년 기록한 전고점을 일찌감치 돌파하고 역사상 처음 1만5000 고지에 올라섰다. 유럽 증시도 올해 상승세를 유지하기는 했다. 독일 닥스(DAX)와 영국 FTSE100 지수는 연초 대비 10% 이상 상승했다. 프랑스 CAC40 지수는 13.3%나 뛰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발 금융 위기로 전 세계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전인 2007년 전고점보다 여전히 낮다. 재정 위기의 진원지인 포르투갈·스페인·그리스는 최고가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지난 2분기 유럽 경제가 18개월 동안 이어진 마이너스 성장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낙관론은 기대가 아니라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 8월 14일 유럽연합(EU) 통계청은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과 EU 전체 회원국 모두 2분기 0.3% 성장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뒷걸음질했던 유로존 경제성장률은 2009년 3분기 플러스로 반전에 성공했다. 곧이어 터진 재정 위기와 구제금융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한동안 성장세를 유지했지만 2011년 4분기 마이너스로 주저앉으면서 고난이 시작됐다. 유럽 경제가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포착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행권의 약진이다. 체력을 회복한 유럽 은행들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중단했던 배당을 재개하고 있다. 프랑스 소시에떼제네랄은 지난 2분기에 9억5500만 유로(약 1조4000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작년보다 순이익이 2배 이상 늘었다. 프랑스 3대 은행인 크레디아그리콜도 예상을 웃도는 분기 실적으로 내놓았다. 이 은행은 2분기에 작년보다 10배 이상 많은 6억9600만 유로의 순이익을 벌어들였다. 스페인 방코산탄데르와 영국 로이드도 실적이 급등했다.
소시에떼제네랄은 내년 35~50%의 이익 배당을 예정하고 있다. 영국 로이드도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중단했던 배당을 내년 초 재개하기로 했다. 바클레이스캐피털에 따르면 유럽 28개 주요 은행의 배당액이 내년에 320억 유로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난해 전체 배당액보다 50% 증가한 규모다.
단일 시장을 형성해 미국을 넘보던 유럽 경제공동체는 2009년 말부터 작동 불능에 빠졌다. 통화 통합이 애초부터 잘못된 아이디어였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유로존 해체는 시간문제로 생각됐다. 하지만 유로화 동맹에서 실제로 탈퇴한 나라는 없다.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로화 역시 건재하다. 최근 다른 나라 통화들이 변동성에 휘둘리는 동안에도 유로화는 상대적으로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아일랜드 연말 구제금융 졸업
올 연말 아일랜드가 유로존 5개국 중 첫 번째로 구제금융에서 졸업한다. 내년 중반에는 포르투갈이 그 뒤를 잇는다. 이렇게 되면 유럽 경제의 부활은 본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모건스탠리는 2분기 플러스 성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전히 강한 경기 회복은 요원한데다 유로존 핵심부와 주변부 간 성장 속도와 체감 경기의 격차가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모건스탠리는 기업들의 재고 증가로 성장률이 일시적으로 증가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실업률도 골칫거리다. 유로존의 6월 실업률은 12.1%로, 1995년 측정을 시작한 이후 최고수준이다. 오스트리아는 4.6%, 독일은 5.4%에 불과하지만 포르투갈 17.4%, 스페인 26.3%, 그리스 26.9% (2013년 4월) 등으로 불균형이 심각하다.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아일랜드의 구제금융 졸업에도 회의적이다. 설사 계획대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취약한 경제 여건 때문에 조만간 다시 구제금융을 받을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은행 역시 정상화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
RBS는 유럽 대형 은행들이 향후 5년간 6610억 유로(약 980조 원)의 자산 매각과 470억 유로(약 70조 원)의 자본 확충에 나서야 할 것으로 예상한다.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제안된 은행연합 구상도 계속 겉돌고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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