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꽃할배 전성시대

“나영석(PD)이 할배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들은 한 명의 할배에 지나지 않았다. 할배들은 파리로 가서 꽃이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대만에서도 꽃이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도 ‘꽃할배’로 만개했다. 직진순재, 신구야형, 낭만근형, 막둥일섭.

그래, 인생은 70부터.” 노배우들이 이렇게 주목받은 때가 있었던가. 최근 케이블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가 연일 화제다. 꽃할배 열풍으로 정·재계 역시 왕성하게 활동하는 70~90대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특히 ‘꽃할배’ 최고경영자(CEO)들의 활약은 한국 경제의 튼튼한 자산이다.
[SPECIAL REPORT] 70~90대 노익장 과시…‘팔팔한 현역, 도전은 쭈욱’
‘노인은 위대한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고 한다. 아프리카 속담 중에는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다. 노년의 삶이 얼마나 막강한지 나타내 주는 말이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이들의 활약은 정계에도 불어 닥쳤다.

요즘은 정치권에도 꽃할배 바람이다. 최근 75세 대통령비서실장(김기춘)이 등장했다. 고령화 시대에 새롭게 나타나는 인사 스타일이라는 평이 돈다. 물론 원로로서 그런 자리를 고사하고 전체 사회의 어른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비서실장 외에도 이연택(78) 새만금위원장, 김동호(77) 문화융성위원장, 한광옥(72) 국민대통합위원장, 이원종(72) 지역발전위원장, 현경대(7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이 모두 칠순을 넘기고 공직을 그만둔 줄 알았던 이들로 채워지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의 영향력 있는 자문 멤버인 최병렬(76) 새누리당 상임고문, 김용갑(78) 새누리당 상임고문도 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가 떠오른다.

꽃할배들의 활약은 재계에서 가장 왕성하다. 70~90대의 베테랑 수장들이 젊은이 못지않은 활동량으로 재계를 주도하고 있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갈고닦은 실력으로 업계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퇴출됐을 것이다.

대표적 꽃할배 CEO는 1922년생인 신격호 총괄회장(91)이다. 신 총괄회장은 10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한 창업 1세대로 현장 경영을 중시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도 롯데백화점과 아울렛 등 현장에 나와 현장 분위기를 살피는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일 셔틀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엔 롯데쇼핑 사내이사에 재선임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신 총괄회장이 다수 계열사 이사직을 겸직한다는 점과 고령이라는 점 등을 들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경영자다.

이 밖에 이재현 CJ그룹 회장 구속 이후 CJ그룹의 비상 경영 체제를 이끌고 있는 손경식(74) CJ그룹 회장의 활약도 돋보인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통하는 손 회장은 CJ의 경영 안정과 중·장기 발전 전략, 그룹 경영의 신뢰성 향상 방안, 그룹의 사회 기여도 제고 방안 등 주요 현안을 심의·결정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 회장 또한 손 회장이 자신의 ‘경영 스승’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며 그룹의 주요 결정이 있을 때마다 허심탄회하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CJ에서 손 회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조석래(78) 효성그룹 회장은 경제사절단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수행하는 등 여전히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 회장은 1935년생으로 경제사절단에 참여한 18명의 대기업집단 총수 가운데 최고 연장자였다. 정몽구(75)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이나 박삼구(68)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보다 나이가 많다. 조 회장은 2007년부터 5년 동안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맡은 바 있다. 회장 시절인 2008년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했을 때 오찬 간담회를 갖고 양국 간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이번 박 대통령의 국가 외교 파트너인 시진핑 주석이 2009년 부주석 자격으로 방한했을 당시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은 적이 있다.

노익장의 활약은 대기업 총수뿐만이 아니다. 국내 청바지 시장 1위 브랜드인 ‘뱅뱅’의 수장 권종열(80) 뱅뱅어패럴 회장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뱅뱅은 1%를 위한 옷이 아니라 99%가 부담 없이 합리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권 회장의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지난해 23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용기 있고 모험 즐기는 적극적 태도
그는 52년 동안 옷 장사를 하면서 가격 대비 품질 좋은 옷을 만들겠다는 철학을 지켜 왔다. 그리고 현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CEO는 무조건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달에 서너 번씩 중국 공장을 찾는다. CEO가 가야 일이 빨리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CEO가 직접 현장에 나서야 좋은 원단을 쓴다는 믿음 때문이다. 패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고객의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 시장조사도 직접 한다. 권 회장이 현장을 놓지 않는 이유는 과거 자신이 동대문 시장에서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아 봤던 경험 때문이다. 도전과 변화에 주저하지 않는 권 회장은 최근에는 직영 매장을 늘리고 청바지 이외에도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는 원스톱 매장으로 변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제약사 오너들의 모임 8진회의 월례회가 10일 경기도 안양CC에서 열렸다. 허억 삼아약품회장(왼쪽부터), 이종호 중외제약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 이경호 제약협회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제약사 오너들의 모임 8진회의 월례회가 10일 경기도 안양CC에서 열렸다. 허억 삼아약품회장(왼쪽부터), 이종호 중외제약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 이경호 제약협회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식품 업계는 대표적인 ‘회장님 장수 업계’다. 정재원(96) 정식품 명예회장, 전중윤(94) 삼양식품 명예회장, 박승복(91) 샘표식품 회장은 아흔을, 윤덕병(86) 한국야쿠르트 회장, 함태호(83) 오뚜기 명예회장, 신춘호(81) 농심 회장은 여든을 넘겼지만 웬만한 청춘보다 더 열정적이다. 대개 사업을 직접 일군 1세대 창업주들이 유독 건강을 뽐내며 장수하고 있고 경영 일선에 활발하게 나서기도 한다. 일부 회장님들은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더라도 제품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자기 관리·열정…그들에겐 특별한 게 있다
국내 식품 기업 창업자 가운데 현존하는 최고령은 1917년생인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다. 두유 제품 ‘베지밀’을 개발한 정 명예회장은 2002년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주요 경영 사항은 보고받고 신제품 개발도 진두지휘한다. 콩의 효능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놓지 않고 있다. 2010년 10월 미국에서 열린 국제 대두(大豆) 심포지엄에서 영어로 콩의 효용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정식품 중앙연구소의 제품 개발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내외 최신 연구 논문을 원서로 챙겨 읽고 정식품 연구원들을 서울 평창동 자택으로 불러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매일 아침 30분씩 반신욕과 산책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EBS 라디오를 통해 영어 공부도 한다.

1922년생인 박승복 회장은 식품 업계 원로 중 외부 활동이 가장 왕성하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을 6번, 한국식품산업협회(전 한국식품공업협회) 회장을 3번 연임하는 등 직함이 20여 개에 달한다. 매일 서울 충무로 사옥에 출근해 월 1회 임원 회의를 주재하고 신제품 개발에도 적극 의견을 낸다. ‘집무실 방문을 닫지 않는 회장님’으로 통하는 그는 샘표식품 임직원의 경조사를 직접 챙길 정도로 끈끈한 사내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자사의 음용 식초인 ‘흑초’를 건강 비결이라고 강조하며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86세의 윤덕병 회장은 매일 오전 10시 서울 잠원동 본사에 출근해 오후 4시 퇴근하며 경영 활동에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사의 신제품 개발과 스포츠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자원이 없는 한국이 살아갈 방법은 과학기술밖에 없다”며 34년째 전국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 지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81세인 신춘호 회장도 경영 일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주요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을 꼼꼼히 챙기는 것으로 유명한 신 회장은 라면과 커피 등 자사 제품 작명에 직접 관여하면서 제품을 알리는 데 앞장선다. ‘신라면’, ‘강글리오 커피’ 등이 신 회장이 직접 제품명을 지은 사례다. 신 회장은 라면이나 커피 등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골프장 라운딩 멤버 등 지인들에게 직접 제품을 맛보여 주면서 홍보에 나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알뜰 오너’로 꼽힌다. 그는 호황 때나 불황 때나 마른 수건도 쥐어짜는 방식으로 지출을 관리하고 불요불급한 은행 빚을 쓰지 않으며 매출이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끈을 늦추지 않고 직접 관리 감독하는 ‘삼박자 경영’으로 유명하다.

83세의 함태호 명예회장은 아들 함영준 회장에게 경영권을 이임했지만 꾸준히 출근하며 주요 경영지표는 직접 챙기고 있다. 최근에는 사원 복지 수준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다고 한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꽃할배 CEO는 제약 업계에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으로 강신호(86) 동아쏘시오홀딩스 회장, 김승호(81) 보령제약그룹 회장, 이종호(81) JW중외제약 회장), 윤영환(79) 대웅제약 회장, 허억(77) 삼아제약 회장, 어준선(76) 안국약품 회장, 임성기(73) 한미약품 회장 등이 있다.

1927년생인 강신호 회장은 박카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월 1회 해외 출장을 소화할 만큼 왕성하다. 비만 치료제 ‘슈랑커’를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강 회장은 건강관리를 잘하는 대표적 CEO로 꼽힌다. 서울 용두동 사옥에서 신설동역까지 걸어 다니는 모습이 직원들에게 종종 포착되기도 한다. 대학생 국토대장정 대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매년 함께 행사에 참가해 10km 구간을 걷곤 한다. 산악 마니아로 히말라야 트레킹도 자주 도전한다.
환담하는 수행경제사절단
28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수행 경제사절단 조찬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환담하고 있다.. 2013.6.28.<청와대사진기자단>
환담하는 수행경제사절단 28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수행 경제사절단 조찬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환담하고 있다.. 2013.6.28.<청와대사진기자단>
1932년생인 이종호 회장도 등산 마니아다. 두 번에 걸쳐 해발 4130m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적이 있다. 그의 이런 도전 정신은 경영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JW중외그룹의 무모한 듯 보였던 투자 성과가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당진 JW생산단지에 1800억 원이란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던 이 회장의 전략이 국내 제약 업계 GMP(우수 의약품 제조·관리제도) 투자의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작은 규모의 국내 제약 기업이 당차게 글로벌 시장에 깃발을 올렸다는 점에서 이 회장의 경영 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SPECIAL REPORT] 70~90대 노익장 과시…‘팔팔한 현역, 도전은 쭈욱’
81세의 이 회장과 동갑내기인 김승호 회장의 행보도 거침없다. 그는 지난 4월 내내 지인과 중국의 실크로드와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 여행했다. 중국 시장 진출을 앞둔 사전 답사 여행이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는가 하면 4600m 고산지대까지 오르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과 하늘을 막은 산,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수많은 중국인을 보며 김 회장은 “‘양(量)으로는 중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질(質)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령제약의 고혈압 신약 ‘카나브’가 개발됐다. 중국 출시는 물론 멕시코 제약 기업과 카나브 2600만 달러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카나브는 누적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국산 신약이 됐다. 김 회장은 수출 계약을 직접 챙긴다. 이번 멕시코 건도 회사 고위 임원들과 함께 직접 멕시코까지 날아가는 투혼을 보였다. 그만큼 해외 수출에 관심이 크다.


신제품 개발, 과감하고 열정적
불도저 CEO로 불리는 73세의 임성기 회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헬스와 산책 등 1시간 동안 운동하고 임원회의를 주재한다. 물론 해외 사업도 직접 챙긴다. 사업 가능성을 타진하러 중국에 갔을 때 새벽 1시까지 회의를 주재하고 오전 7시 조찬 모임을 갖던 열정적 모습은 지금도 직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제약 업계는 또래 회장들의 친목 모임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골프를 하는 ‘8진회’다. 37년째 함께하는 멤버는 강신호 동아쏘시오홀딩스 회장,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 이종호 JW홀딩스 회장, 윤영환 대웅제약 회장, 허억 삼아제약 회장,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 유영식 전 동신제약회장, 윤원영 일동제약 회장등 8명이다. 꽃할배 입성을 목전에 둔 ‘예비 꽃할배’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스마트폰 부품 대표 업체인 김재경(66) 인탑스 사장과 김학권(67) 재영솔루텍 사장이다. 스마트폰 판매량이 늘어나며 카메라 관련 업체와 액세서리 등의 스마트폰 부품 업체들의 덩치가 커졌다. 이와 함께 이들은 제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금형의 프랜차이즈화로 세계 제패를 꿈꾸는 재영솔루텍의 김 사장은 금형 산업을 토털 솔루션으로 개발 관리하는 첨단 산업으로 변모시켰다. 이 회사는 최고급 수준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사용되는 800만, 1200만 화소급 렌즈를 생산·공급한다. 현재 시가총액이 260억 원으로 강소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또 최근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개성공단이 잘 되면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도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에 관심을 끌고 있다.

스마트폰 케이스 산업을 이끄는 인탑스의 수장인 김 사장의 도전 정신도 돋보인다. 백색가전 외관 부품을 만들던 회사를 1983년 삼성전자와 연을 맺고 갑자기 휴대전화 부품 업체로 탈바꿈시킨 것. 김 사장을 비롯해 인탑스 직원들은 난생처음 전화기에서부터 휴대전화까지 유행에 맞는 케이스들을 만들어 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면서 기존에 없던 증착 기술을 업계 최초로 개발하고 레이저 가공 공정도 도입했다. “이대로 안주하다가는 도태될 수 있다”는 김 사장 나름의 위기 경영 감각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김 사장은 연구팀을 꾸려 플라스틱과 금속 간 효과적인 접합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시도한 노력으로 지금의 성공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규영 정신과 전문의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통합 능력, 전체를 보는 능력이 발달하고, 풍부한 인생을 토대로 깊은 통찰력이 생긴다”며 “젊은 2세들이 공격 경영을 하는 데 상호 보완해 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