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공룡’이케아 창립자 잉바르 캄프라드

스웨덴의 가구 공룡 이케아의 제품은 이제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세계 40개국에 338개 매장을 두고 7만5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이케아는 2014년 말 국내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케아의 창립자와 독특한 경영구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케아의 창립자 잉바르 캄프라드(87)는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대 부호이자 20세기 최고의 기업가 중 하나로 불린다. 하지만 ‘지독한 구두쇠 영감’이라는 별명도 있다. 연간 40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의 오너지만 기부 등에 인색해 좋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구두쇠 철학에는 소비자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가게 하겠다는 굳은 경영 원칙이 들어 있다.
<YONHAP PHOTO-0308> Soon-to-be customers wait in line for the grand opening of the Ikea Group store in Centennial, Colorado, U.S., on Wednesday, July 27, 2011. The 415,000-square-foot Centennial location, which opened today, is the 38th store in the U.S. for Ikea, the world's largest home-furnishings retailer. Photographer: Matthew Staver/Bloomberg/2011-07-28 08:09:39/
<????沅??? ?? 1980-2011 ???고?⑸?댁?? 臾대? ??? ?щ같? 湲?吏?.>
Soon-to-be customers wait in line for the grand opening of the Ikea Group store in Centennial, Colorado, U.S., on Wednesday, July 27, 2011. The 415,000-square-foot Centennial location, which opened today, is the 38th store in the U.S. for Ikea, the world's largest home-furnishings retailer. Photographer: Matthew Staver/Bloomberg/2011-07-28 08:09:39/
이케아의 창업자 캄프라드는 어릴 적부터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스웨덴 소년 캄프라드는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43년 그의 이름과 그가 자란 농장, 마을의 첫 글자를 따 이케아(IKEA)를 설립하고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을 종잣돈으로 삼아 지갑·시계·보석·스타킹 등 다양한 상품을 팔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그는 가구 제품도 팔기 시작했다.

젊은 신혼부부들이 비싼 가구를 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당시 스웨덴의 신혼부부들은 높은 할부 이자를 부담하며 비싼 가구 제품을 사거나 수입된 하급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는 전시장의 화려한 가구들을 보며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최고의 디자인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며 “1000달러짜리 책상이 아니라 50달러짜리 품질 좋은 책상을 만드는 게 최고 디자이너”라고 정의했다.

지역의 소규모 가구 제조업체를 이용해 저렴하게 생산한 이케아의 가구는 대히트를 거뒀다. 1951년 캄프라드는 다른 제품 판매를 모두 중단하고 가구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53년 첫 번째 쇼룸을 열었다. 가구의 가격을 낮췄기 때문에 이케아 가구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품질에서는 최고를 지향하되 나머지 유통·배송·마케팅 등에서 비용을 모두 없애 저렴한 가격을 유지한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이때 발현됐다.


협력 업체의 거래 중단이 혁신 시스템으로
이케아가 소비자들이 직접 조립·배송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는 의외로 엉뚱하다. 낮은 가격을 추구하는 캄프라드의 철학이 반영되긴 했지만, 실제로 캄프라드가 조립된 가구를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낮은 가격 덕분에 급성장하는 이케아를 견제하는 경쟁 업체들이 이케아의 공급 업체들을 압박했다. 이 때문에 가구 조립 업체, 배송 업체 등이 이케아와의 거래를 중단했다. 이케아는 조립이 안 된 원목 상태의 자재를 싸게 팔았고 소비자들은 이를 사서 직접 가져와 집에서 스스로 조립해야 했다. 직접 조립·배송 시스템이 저렴한 가격을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와 맞물리면서 혁신적인 가구 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이케아의 원가절감 전략은 또한 이케아의 매장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케아의 매장은 대부분이 점포세가 비싼 도심이 아니라 도시 외곽 지역에 있다. 홍보 전략은 오직 카탈로그뿐이다. 이케아는 제품 하나하나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 만든 카탈로그를 대량 배포한 다음 고객이 스스로 찾아오도록 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마진이 높은 대신 매출이 적은 전통적인 스웨덴 가구 상점들과 반대로, 이케아는 마진이 낮지만 매출을 높이는 박리다매 전략에 역점을 뒀다. 이 모든 요인 덕분에 이케아는 경쟁 업체보다 20%나 저렴하게 팔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 양보하지 않는 것은 디자인과 품질이다. 캄프라드는 수상 실적이 많은 디자이너만 고용한다. 독특한 디자인은 물론 조립하기가 쉬워야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캄프라드는 ‘낮은 가격’이란 약속을 어떤 경우에도 깨지 않았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유가가 상승했을 때 생산비와 유통비가 급등해 심한 적자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탈로그에 표기한 가격은 절대 바꿀 수 없다며 1년 동안 원래 가격을 고수했다. 최근 글로벌 매장 확장에도 불구하고 2000~2010년 사이에 가격 상승률은 2~3%에 불과했다.
[글로벌 CEO] 세계를 석권한‘구두쇠 경영’의 저력
이케아는 글로벌 확장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외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돈을 버는 만큼만 성장해야 한다’는 철칙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해외 진출을 앞두고 금융권으로부터의 융자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금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캄프라드는 ‘지독한 구두쇠’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케아의 낮은 가격 고수 정책도 그의 이런 성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스위스의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일하러 갈 때는 지하철을 타고 꼭 운전해야 할 때는 연식이 20년 된 1993년식 볼보를 몬다고 밝혔다. 출장 갈 때도 이코노미 클래스만 타고 호텔에 머무를 때 비싼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근처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온다. 또한 그의 사무실 의자는 32년 된 이케아 의자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때도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떨이 세일만 이용한다. 세계 최대 갑부라는 타이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히 그의 구두쇠 철학은 이케아의 기업 문화로도 이어져 이면지를 이용해야 하는 게 회사의 방침으로 정해져 있다.

이케아는 지금도 창업자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오너 기업’의 성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독특한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실수 면허장’이다. 직원들에게 엄격한 책임이 지워지는 한편 실수하더라도 추궁 받지 않을 수 있는 면허도 부여된다. 캄프라드의 생각으로는 ‘실수는 행동하는 자의 권리’라는 것이다.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관료주의의 요람이고 모든 발전의 적이다. 어떤 결정도 오로지 옳은 것만 요구할 수는 없다. 결정의 올바름을 판가름하는 것은 추진력이다. 실수하는 것은 허락돼야만 한다.”


소비자 우선하는 경영 원칙 고수
이케아는 오너가 직접 경영하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경영권 상속에 대한 캄프라드의 철학은 남다르다. 캄프라드는 1986년에 이케아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리고 스티칭 잉카(Stichting INGKA)재단을 설립해 재산의 대부분을 재단에 기부했다. 현재 캄프라드가 이사장으로 있는 이 재단은 이케아의 세금 최적화, 적대적 인수로부터의 보호가 주목적으로 순수 비영리 재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재단이 이케아그룹의 모회사 잉카홀딩스를 소유함으로써 캄프라드와 그의 부인, 변호사가 속한 이사회의 5인이 승인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이케아의 지배권 간섭이 불가능하다. 이케아의 지배 구조는 캄프라드가 죽더라도 후계자가 바꿀 수 없도록 설정해 뒀다.

캄프라드는 그의 자녀에게 경영권을 상속하지 않았다. 현재 캄프라드의 세 아들은 이케아의 이사회에서 역할을 할 뿐이다. 이케아의 최고경영자(CEO)는 34년 동안 이케아에 충성한 마이클 올슨이 맡고 있다. 올슨은 2013년 9월 이케아의 전성기를 이루는 데 일조한 피터 아그네프옐에게 CEO 자리를 넘겨줄 예정이다. 즉, 내 자식이 아니라 이케아에 공헌한 인물이 CEO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오늘 나는 내 자식들을 신뢰하고 있지만 내일도 그 아이들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캄프라드 가문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케아가 계속돼야 한다.”

캄프라드는 개인적으로 젊은 시절 나치 추종, 알코올 중독, 지나친 근검절약과 노조에 대한 비판적 성향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이케아는 포름알데히드를 방출하는 환경문제로 곤욕을 치렀고 제3세계 아동 노동을 착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무엇보다 소비자를 우선하는 경영 원칙을 고수해 왔고 이케아는 여러 문제를 잘 해결해 왔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