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실업의 30년‘을 노하우’

한세실업은 대표적인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 수출 기업이다. 규모도 세계 OEM 업계에서 ‘톱 10’ 안에 든다. 베트남·니콰라과·과테말라·인도네시아·중국 등 5개국에 해외 법인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1조1295억 원의 매출과 63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임직원은 서울 본사에 700명, 해외 생산 기지에서 2만7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세실업이 생산하는 옷은 미국 대형 마트인 월마트·타깃을 비롯해 나이키·갭·아메리칸이글·에버크롬비&비치·리미티드 등에 납품되고 있다. 지난해 한세실업이 미국에 내다판 옷은 2억3000만 장. 미국 인구 1.5명당 한 벌씩 한세실업의 옷을 산 셈이다.
[비즈니스 포커스] 갑 움직인‘슈퍼 을’…을의 한계를 넘다
OEM으로 제품을 생산하면 발주자와 생산자는 ‘갑을 관계’다. 갑의 횡포는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갑은 갑이다. 의류 OEM은 발주를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발주를 받더라도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거나 제품에 작은 하자라도 발생하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단가가 워낙 박하다 보니 이런 문제로 문을 닫은 OEM 업체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하지만 한세실업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들만의 ‘을 노하우’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성공하는 기업의 비결 중 최고경영자(CEO)의 몫은 절반 이상이다. 한세실업이 30년간 을로 지내면서 고속으로 성장한 것은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세실업의 창립 연도는 1982년이다. 1980년대에 해외에 나가 사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은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그저 그런 회사에 불과했다. 요즘처럼 ‘코리아’ 브랜드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김 회장은 그런 상황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김 회장은 을은 을이되 한 차원 높은 을을 지향했다. 일반적으로 갑을 관계는 갑이 주도권을 쥐고 을은 갑의 일방적인 지시를 전달받는 단순 하청 수준이다. 그러나 한세실업은 주도권의 상당 부분을 갖는 ‘슈퍼 을’의 위치까지 올라섰다. 한세실업의 30년 ‘을 노하우’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눈덩이처럼 쌓인 것이다.

한세실업의 30년 ‘을 노하우’ 중 가장 먼저 연구·개발(R&D)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세실업이 보통의 OEM 업체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강력한 R&D 역량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세실업은 2003년 디자인연구소 설립과 함께 OEM에서 제조업자 개발 생산(ODM)으로 전환하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ODM은 단순 위탁 생산에서 벗어나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파는 것이다. OEM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단순한 위탁 생산은 힘을 잃어 갔다. 대신 원단부터 시작해 풀 컬렉션을 제시해야 오더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한세실업은 2008년 3월 미국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미국 현지인들로만 구성된 다자인사무소를 차렸고 한국 본사에는 원단개발팀과 디자이너팀을 따로 둘 정도로 디자인 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다. 서울과 미국 연구소의 연구 인력은 70여 명인데, 이들은 대부분이 미국 파슨스·FIT(미국 뉴욕주립대 산하의 예술·디자인·비즈니스·기술 전문학교) 등 글로벌 명문 패션 스쿨 출신이다. 엄진 한세실업 연구개발본부 부실장은 “디자인은 1~2년 앞서, 소재는 그보다 더 먼저 개발한다”며 “해외 유명 브랜드 수주를 위해서는 트렌드 분석은 물론 창의적인 소재와 디자인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세실업 본사에서 제작하는 샘플 의류 제작만 연간 36만여 장이다. OEM에서 ODM으로 전환한 것은 중국이나 동남아 OEM 업체와의 격차를 크게 벌려 놓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비즈니스 포커스] 갑 움직인‘슈퍼 을’…을의 한계를 넘다
스피드 경영도 한세실업이 30년 만에 세계 톱클래스의 ODM 업체로 성장한 요인 중 하나다. 유행에 민감한 의류 산업의 특성상 신속한 의사결정은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 변수다. 한세실업은 팀 단위의 분권화된 조직 관리가 회사 초창기부터 이뤄져 오다 보니 몸집이 가볍다. 수십억 원에 달하는 수입 원단 결정권이 경영진이 아닌 팀장급 실무자에게 있을 정도로 팀제가 확고하게 구축됐다. 바이어에 따라 팀을 나누고 팀 안에서 바이어 상담, 가격 조정, 구매 진행, 생산 관리까지 모두 진행된다. 영업부(수출부)는 500여 명의 직원이 50개 팀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은 현장에서 오랜 기간 고객들을 관리하며 튼튼한 신뢰 관계를 구축해 왔다. 최민주 현대증권 애널리스트는 “OEM(ODM) 기업의 생명력은 힘이 센 바이어와의 신뢰 관계”라며 “한세실업은 품질·납기를 빠르고 정확하게 지키면서 바이어와의 오랜 신뢰 관계를 구축한 게 강점”이라고 말했다.


디자인 역량 높여 주도권 확보
한세실업의 스피드 경영은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세계 각국에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유효했다. 1987년 사이판 지역에 진출한 이후 1998년 대미 수출에 유리한 니카라과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했고 2001년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력을 가진 베트남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2005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데 이어 올 초 미얀마 지역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양곤 지역 단위 공장 인수를 결정했다. 이들 공장은 지역별로 특화돼 있다. 손재주가 좋은 인력을 많이 보유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공장은 요구 조건이 까다로운 나이키·갭·아메리칸이글·리미티드 등의 의류를 만들고 있으며 미국과 가깝고 일정량을 무관세로 수출할 수 있는 중남미 공장은 월마트·타깃 등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제품을 생산한다. 이처럼 전 세계에 포진한 생산 기지는 스피드 경영은 물론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원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스피드 경영을 위해서는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하나의 비전 아래 창의적이고 신속하게 판단하고 추진하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는 신뢰 경영이 필수적인데, 신뢰 경영은 소통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한세실업의 소통 방식 중 ‘조깅 미팅’과 ‘모닝 데이트’가 인상적이다. 올해로 3년째 진행 중인 ‘조깅 미팅’은 매주 화·수·목요일마다 아침 7시 본사 앞 여의도 공원에서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팀별로 열린다. 약 1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조깅이 끝난 후 아침 식사 겸 티타임 장소는 회사 근처 커피 전문점이다. ‘모닝 데이트’는 김 회장이 직접 직원들을 만나 소통하는 제도다. 외국인 사원, 신입 사원, 팀장 등 그룹으로 나눠 김 회장과 미팅을 갖는 방식이다. 직원들이 자신들이 맡은 업무와 비전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소통의 자리라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비즈니스 포커스] 갑 움직인‘슈퍼 을’…을의 한계를 넘다
신뢰 경영은 인재 육성과도 직결된다. 인재 육성 전략이 없는 신뢰 경영은 팥소가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기업 경영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기업인 삼성의 성공 비결을 특유의 인재 제일주의에서 찾는 전문가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세실업도 마찬가지다. 한세실업은 세계 각지에 생산 시설을 두고 있다. 고객도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다. 세계를 무대로 뛸 수 있는 글로벌 인재들이 없이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한세실업은 좋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용백 한세실업 대표는 “삼성보다 5%가 아니라 15% 이상 더 주자는 게 목표”라고 말해 왔다. 한세실업의 지난해 대졸 신입 사원 공채 초봉은 약 4000만 원이다. 또한 영업이익에 따른 인센티브와 차량 유지비, 식대 등 각종 복지 수당까지 포함한다면 4대 그룹 연봉이 부럽지 않다고 한다. 직원들은 입사 1년 후부터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에 있는 해외 생산 법인에 근무할 기회를 얻게 된다. 생산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업무의 A부터 Z까지 익히고 1000명이 넘는 근로자들을 관리해 봄으로써 글로벌 리더의 역량을 키운다. 베트남에서 약 2년간 근무한 수출1A21팀의 조리라 과장은 “기본적인 베트남어를 할 수 있게 됐다”며 “해외 근무 경험은 현재 팀장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포커스] 갑 움직인‘슈퍼 을’…을의 한계를 넘다
많은 기업들이 의욕적으로 해외로 진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따리를 싸서 돌아오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현지 직원들의 의식 수준이나 문화가 전혀 다른 상황에서 ‘한국식’을 고집하다가 벽에 부딪친 경우다. 그래서 해외 진출 기업들은 현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세실업은 현지화에도 성공하면서 을의 힘을 극대화했다.

한세실업은 해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과의 융화를 우선했다. “당신네 나라에 투자했다”고 큰소리치는 식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인간적 차원에서 겸손하게 접근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해 왔다. 예를 들어 법인장을 비롯해 간부들은 일반 생산직 근로자의 결혼식 참석을 비롯해 장례식 조문에 무조건 참석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을 노하우’로 단련된 한세실업이지만 자체 브랜드 유통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2003년 온라인 서점 예스24를 인수한 한세실업은 2011년 2~7세 유아용 브랜드 ‘컬리수’의 드림스코를 인수했다. 또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대형 SPA(제조·유통 일괄화 의류) 브랜드를 키운다는 꿈을 꾸고 있다. 앞날은 밝다. 이미 SPA 브랜드가 신규 고객으로 속속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H&M과 첫 거래를 시작했고 올해부터 자라·망고 등이 추가됐다. SPA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생산과 이를 통한 저가 정책 및 유통이 핵심이다. 한세실업은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세실업의 리스크를 꼽아 달라는 주문에 모든 매출이 해외에서 이뤄지다 보니 환율 영향이 크다는 점과 여전히 강력한 경쟁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혜미 KDB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생산 거점이 비슷하고 다수의 고객사가 겹치는 세아상역이 한세실업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가격 결정력을 훼손해 수익성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세실업 측은 “생산과 유통을 겸하는 세계적 패션 기업으로의 성장하는 데 장애는 없다”며 “지난 30년 ‘을 노하우’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반박했다. 한세실업의 OEM(ODM) 모델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악조건에서도 길을 찾고 창의적으로 움직이면 기업은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한세실업이 보여줬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