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공시족’의 하루
# 노량진 학원가의 한 카페에서 만난 2년 차 ‘공시족’인 이모(26) 학생은 기자가 말을 걸자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조금 귀찮은 듯한 반응이었다. “워낙 혼자 공부하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할 때가 있다. 괜히 같은 학원 학생이나 스터디 모임으로 친해지게 되면 시험에 실패할까봐 섣불리 친분을 맺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그녀의 일과는 여느 고3 수험생과 다를 바가 없다.
“아침 7시부터 노량진에 와서 학원 자습실에서 어제 수업 복습을 하고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2시부터 6시까지 오후 강의 듣고 저녁을 먹고 밤에는 인강(인터넷 강의)을 듣거나 독서실에서 자습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학원의 수업 시간에는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다고 했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냥 딱히 꿈도 없고 부모님도 공무원이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해서 준비하고 있다. 부모님한테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게 미안해서라도 빨리 합격하고 싶다”고 말했다. 7·9급 공무원, 대학 편입, 고시 등 각종 시험 전문 학원이 밀집해 있어 공무원 시험 준비생인 일명 ‘공시족’의 집결지인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을 찾았다. 노량진 고시타운은 지하철 1호선, 9호선 노량진역의 육교에서 사육신공원 앞의 육교까지로, 대략 노량진 학원의 터줏대감인 남부행정고시학원부터 신생 멤버인 윈플스 공무원 학원까지다.
지난 7월 30일 오후 1시쯤 노량진역에서 내려 학원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노량진의 명물이 된 ‘컵밥’을 파는 노점상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량진 ‘컵밥’은 컵라면 그릇처럼 생긴 용기에 볶음밥·덮밥 등을 담아 2500원 안팎의 가격에 팔고 있는 한 끼 식사다.
주머니 사정이 가볍고 공부 때문에 빨리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고시생들에겐 안성맞춤인 컵밥은 요즘 삼겹참치불고기·스팸참치마요·닭갈비오리훈제 등 다양한 메뉴가 판매되고 있어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인도마다 줄 지어 늘어선 노점상에는 편안한 반바지와 샌들 차림의 고시생들이 대부분 ‘나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마저도 아까운지 단어장을 손에 들고 밥을 먹는 이들도 많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길거리에는 많은 공시족들이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스터디 모임’을 하는 모습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공시족들에겐 ‘학원’이 곧 ‘학교’
이번에는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으로 향했다.
지난 7월 27일 2013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이 끝나 학원가가 한산할 줄 알았는데 기자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학원마다 지난주에 끝난 시험의 ‘무료 해설 특강’이 진행되고 있었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자가 찾아간 윈플스 공무원 학원의 권순호 대리는 “이제 수험생들은 8월 24일 지방공무원 시험, 9월 7일에 있을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더 바빠졌다. 지난주에 국가공무원 시험을 치른 응시자들이 대부분 연달아 시험을 보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2층 안내 데스크 옆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도 인강을 듣는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김모(27) 씨는 지난주 시험에서 비교적 합격 안정권에 해당하는 점수여서 표정이 밝았다. 내년에 있을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는 그는 ‘공시족’이 된 이유에 대해 “고졸이다 보니 취업에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대학 입시 시험을 보려다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공무원 시험으로 방향을 틀었다. 취업할 때는 출신 학교나 외모·배경 등이 영향을 끼치는데 공무원 시험은 그나마 평등하게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이 든다. 퇴직하면 연금도 나오니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뭘 하고 싶으냐는 말에 “다른 건 모르겠고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노량진표 컵밥을 다시는 먹지 않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은 국어학과의 인기 강사인 이재현 교수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답을 맞춰 보고 시험 유형을 분석해 보는 수험생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몇은 에너지 음료를 연신 마시면서 졸음을 쫓고 있었다.
전체 강의실 가운데에는 전문 PD가 강의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녹화된 대부분의 강의는 곧바로 온라인 유료 서비스로 제공돼 수험생들이 복습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고 했다.
권 대리는 “요즘 취업이 워낙 어렵고 평생직장을 선호하다 보니 갈수록 공무원 시험의 인기가 높아져 수험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도 고졸부터 명문대 졸업생까지 다양하다고 했다. 대개는 대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많이 왔지만 최근 들어 휴학한 대학교 2, 3학년생들도 부쩍 늘었다고 했다. “ ‘공시족’들에게 학원은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실제로 스터디 모임을 짜주고 진도를 관리해 주는 일종의 ‘담임교사’도 있다.”
그는 ‘공시족’들은 성인이기 때문에 학원이 일종의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했다. 실제로 스터디 모임을 짜주고 진도를 관리해 주는 일종의 ‘담임교사’도 있었다. 혼자서 시험 준비를 하거나 온라인 강의만 듣기에는 시험의 각종 정보를 놓치기 쉽고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 보니 ‘공시족’들의 대부분은 노량진 학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에 연고를 둔 많은 고시생들이 굳이 노량진에 방을 얻어 눈물겨운 타향살이를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여름방학·시험 특수로 빈 방 없어
9급 공무원 시험의 기본 이론반의 가격은 대략 40만 원 선이다. 학생들이 학원을 선택하는 기준은 대략 두 가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인기 강사진의 라인업이며, 모의고사나 자습실 등의 서비스 등에 따라 학생 수가 좌우되기도 한다.
이번에 국가직 9급 가운데 세무직에 응시한 윤모 학생은 “대부분의 공시족들은 각 과목별로 인기 있는 강사에 따라 여러 군데의 학원에 분산해 다닌다. 가격대는 거의 비슷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인기 강의를 좋은 자리에서 듣기 위한 학생들의 경쟁은 치열하다.
노량진 학원가에서는 일명 ‘노트줄’이라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데, 수강 신청을 하거나 강의를 들으려고 줄을 서는 시간조차 아까워 도착한 순번대로 자신의 노트를 놓고 사라지는 게 보편화됐다.
학원 수업 이외에 자체 모임인 스터디도 시험 준비의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대개 공무원 시험 준비 커뮤니티 등에 글을 올려 팀원을 모은다. 혼자 공부하면 자칫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함께 모여 단어 공부나 진도를 체크해 준다는 것이다. 결석하거나 실력이 뒤처질 때에는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자체 룰을 만들어 가차 없이 ‘제명’하기도 한다.
한편 이번에 치러진 국가직 9급 공채 시험은 예년과 달라 수험가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해당 시험과 관련해 그간은 ‘국어·영어·한국사·행정법·행정학’ 등 총 5과목을 평가했는데 올해부터는 ‘국어·영어·한국사’는 공통과목이 되고 선택과목으로 ‘행정법·행정학’과 더불어 고졸 수험생들의 유입을 활성화하기 위해 ‘사회·과학·수학’ 등을 신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통과목은 ‘원점수’로, 선택과목은 일종의 상대 평가랄 수 있는 ‘조정점수’로 매겨 합한 점수를 총점으로 만들기 때문에 시험 후 가채점하더라도 자신이 합격 안정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어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한 강사는 “이번에 행정법과 행정학이 생각보다 쉽게 출제돼 상대적으로 조정점수가 낮아질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이들이 여럿 있다. 또 처음 실시된 사회·과학·수학은 예상보다 너무 어렵게 나와 시간 안배에 실패했다고 억울해하는 이들도 많다. 어차피 1차 합격자 발표는 10월쯤이기 때문에 조만간에 치러질 지방직, 서울시 시험 준비에 다시 돌입하라고 조언하고 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도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공시족’들은 합격에 대한 불안감과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마음이 약해지기 쉽다고 했다.
스트레스 해소 위해 노래방·당구장 가
이번에는 ‘공시족’들의 ‘식사와 유흥’을 책임지는 학원가 뒷골목으로 가 봤다. 밥집과 술집·카페·노래방·독서실·피시방·당구장·헬스장·원룸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경찰공무원 준비생들은 체력 시험에 대비해 ‘운동학원’도 다닌다고 했다. 올해부터 순경 채용 규모가 대폭 늘면서 경찰 시험 관련 수험생들도 많아졌다.
고시텔 현관에 ‘빈 방이 없으니 문의 전화도 하지 마시오’라고 써 붙여 놓은 곳이 많았다. 최근 공무원 시험이 몰려 있고 여름방학이다 보니 현재 노량진에는 ‘공시족’이 포화 상태라는 것.
노량진에서 특히 장사가 잘되는 업종은 밥집, 생필품을 파는 슈퍼마켓, 오락실과 당구장, 술집, 스터디 룸을 구비한 카페, 복사 가게 등이다. 워낙 유동인구가 많다 보니 가게들의 권리금도 최근 꽤 올랐다고 근처 부동산 관계자가 말했다. 공시족이 많은 만큼 가게들도 늘다 보니 요즘은 손님 유치를 위한 경쟁도 치열해 저렴한 가격과 친절은 필수라고 했다. 슈퍼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신는 슬리퍼, 커피, 에너지 음료,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여행용 티슈, 고시원에서 사용할 두루마리 휴지 등이 잘 팔린다. 예전에 대유행했던 테트리스 등 고전적인 게임기와 인형 뽑기 자판기도 노량진에서는 인기였다.
이처럼 학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오락 시설들이 군데군데 많았고 이와 대조적으로 조용히 공부하거나 쪽지 시험을 볼 수 있는 스터디 룸도 인기였다.
더불어 ‘공시족’들은 모의고사나 각종 자료 등의 제본을 만들거나 출력할 일이 많기 때문에 복사 가게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바쁜 공시족들을 유치하기 위해 ‘출력 분당 120장’이라고 써 붙여 놓은 곳도 있었다.
학원 근처 약국에서도 시험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고 했다. 노량진에서 5년간 약국을 운영 중이라는 한 약사는 “피로 해소나 원기 보양에 좋은 홍삼이나 드링크류, 영양제 등이 특히 잘 팔리는 편이다. 지난주 9급 시험을 앞두고 특히 많이 팔렸다. 이 밖에 만성 스트레스로 소화제를 먹거나 장시간 공부를 하다 보니 눈이 건조해져 인공 눈물을 찾는 이도 많다”고 말했다.
커피 1000원, 복사 60원…노량진은 ‘염가 행진’
노량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싸다는 것이다. 이는 지갑이 얇은 고시생들의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아메리카노는 1000~1500원 선이고 식사도 대개 김치볶음밥 ·대왕돈가스 ·제육볶음 등이 3000원을 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다른 가게와 가격 경쟁력을 갖기 위해 커피를 900원대에 파는 카페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후에 ‘모닝커피 900원’을 내걸며 손님을 유치하려는 곳도 늘었다.
공시족들은 대개 점심·저녁을 바깥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식비 부담이 큰 편인데, 이런 부담을 덜고 고정 손님을 확보하기 위해 근처 식당과 분식점은 ‘10회권에 3만2000원’ 등 저렴한 가격에 식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슈퍼마켓도 할인 경쟁이 치열했다. 학생들이 자주 마시는 캔커피·과자 등을 비롯해 비누·휴지 등 생필품 등의 가격이 시중가보다 최소 20%는 저렴했다. 근처 원룸에 살고 있다던 한 남학생은 “그나마 노량진의 물가가 싼 편이어서 공부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슈퍼마다 ‘노량진 최저가’, ‘폭탄 세일’ 등의 유인물을 붙여 둔 곳이 많았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쇄 가게의 복사 값도 시중보다 저렴한 편이다. 한두 장씩 인쇄하는 게 아니라 책 한 권 분량을 복사하는 공시족들이 많다 보니 10원, 20원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노량진의 복사 가격은 대략 단면 30원, 양면 60원 선으로 형성돼 있다. 한 학생은 “시험 때문에 사야 할 책이나 문제집이 너무 많은데 전부 다 사면 부담이 커 제본을 하는 편이다. 안양에 있는 우리 동네보다 이곳의 복사 가격이 훨씬 싸 무조건 노량진에 와서 복사한다”고 말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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