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현대인들은 바쁘다. 실제의 삶이 바쁘고 생각도 바쁘다. 심지어 생각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른 세상이다. 삶의 속도를 생각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니 영혼의 속도를 도닥일 여유가 없다. 심지어 영혼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 종교마저 전투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충고하면서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말한다. 진득하게 한 3년쯤 투자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은 분명 솔깃하다.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개 꼬리 3년 묵힌들 족제비 꼬리 될까?”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서당 개’ 얘기는 그리 녹록한 말이 아니다.
'10만 시간 법칙' 의 허와 실,  개 삼 년이면 저절로 풍월을 읊을까?
성찰 없는 반복은 시간 낭비

개 가운데 서당에서 기르는 개보다 풍월을 따라 읊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진 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당에서 그냥 3년을 지낸다고 개가 저절로 풍월을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지런히 듣고 연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당구풍월(堂狗風月), 즉 서당 개 이야기는 ‘비록’ 환경이 제일 좋은 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3년은 부지런히 익혀야 ‘겨우’ 풍월을 읊을 수 있다는 뜻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가장 좋은 환경에서도 어느 정도 일정한 시간을 들이고 노력해야 흉내쯤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이후 너 나 할 것 없이 1만 시간이니 10만 시간이니 등의 법칙을 외친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분명 옳다. 다만 그 시간을 어떻게, 왜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이뤄지겠지 여기며 보낸 시간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서당 개도 저절로 풍월을 읊게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뭔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부럽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재즈 카페에서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색소폰을 폼 나게 연주하는 걸 보면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나도 저렇게 연주나 노래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것을 그렇게 능란하게 다루기까지 들인 공과 노력은 보지 않는다. 그저 결과만 본다. 그러니 평생 남 잘하는 것을 부러워만 할 뿐 자신은 그걸 즐길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색소폰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큰맘 먹고 레슨을 받기로 한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큰돈을 들여 악기를 장만했기에 쉽게 포기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생각만큼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실력이 일취월장 늘지도 않고 연습이라는 게 꾸준하지 않으면 별 성과도 없으며 초보 시절엔 음악적 즐거움도 없기 때문이다. 삑삑 뻑뻑 대는 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소음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레슨을 한두 번 빼먹게 되고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심정으로 주저앉는다.

왜 그럴까. ‘3, 3, 3’ 법칙이라는 게 있다. 뭐든지 처음 배우고 시작할 때 3주가 첫 번째 고비다. 완전 초보에게는 즐거움이 없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둔다. 그 고비 잘 넘기고 나서도 3개월쯤 되면 한계를 느낀다. 이제 어지간한 흉내는 내는데, 매끄럽게 치고 나가지 못한다. 일종의 ‘문턱 효과’처럼 해도 늘지 않고 하지 않아도 줄지 않는 정체 상태다. 그 고비를 넘겨야 하는데, 이때쯤이면 꼭 핑계를 댈 만한 일이 생긴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걸 핑계를 삼아 그만둔다. 하지만 꾹 참고 3년쯤 되면 아무리 둔하고 늦된 사람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가게 된다. 그러니 뭘 하나 시작할 거면 3년은 진득하게 지속할 각오를 해야 한다. 서당의 개조차 풍월 흉내 내는 데 최소한 3년 걸렸다. 3년은 적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나머지 인생 전체를 고려한다면 그리 대단한 투자도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목적의식이 의외로 허약하기 때문이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왜 실행하기로 결심했는지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 목적의식은 조금은 멀리 잡아야 한다. 흔들릴 때마다 유혹과 자기 관용에 넘어가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게 하는 힘은 확고한 목적의식이다. 이런 케이스는 학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리 사회처럼 철저하게 학력 위주의 사회에서 서열화된 학력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솔직하게 따져보자. 어떤 사람은 일찍 물리가 트이기도 하고 반면 어떤 이는 늦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일률적으로 같은 시간 안에 결실을 봐야 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그것을 역전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 어리석은 서열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갈 것인가.

일류 대학 학생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한다. 책도 더 많이 읽는다. 그러니 한 번 서열이 정해지면 어지간해서는 역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무도한 학력 서열을 깨기 위해서는 하위 서열에서 적어도 두세 배는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최소한 3년은 지속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실력으로 비등해질 수 있다. 그래도 서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비등해지는 점은 목적이 아니라 전환점일 뿐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3년 죽으라고 연마하면 비로소 실질적으로 역전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탄력도 붙고 눈도 뜨인다.



노동생산성이 최하위권인 이유

현재에 충실하면서 삶의 기운을 북돋우며 재충전할 수 있고 미래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3년 ‘쯤이야’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 그저 시간이 남아 한 번 해보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과 목적의식을 갖고 다가서지 않으면 ‘개 꼬리 3년 묵힌다고 족제비 꼬리 될까?’라는 비아냥이나 듣기에 딱 좋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1개국 중 23위라고 한다. 실제 내용상으로는 순위가 무색할 만큼 최하위 수준이다. 미국 노동생산성의 절반 수준이고 일본보다 15% 이상 떨어진다. 그것도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따질 때 그렇고 정작 노동시간당 생산성은 30위다.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일본에 35%쯤 밀린다. 노동시간은 최장인데 생산성이 떨어지는 까닭이 뭘까. 한국생산성본부는 유능한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생산성이 높은 이유로 일선 직원의 조직에 대한 성과나 생산성에 대한 영향이 적으므로 능력이 확인된 직원을 조기 발탁해 승진시키고 엄격하고 경쟁적인 환경에서 리더를 선발해 지속적으로 능력을 향상시키도록 하며 나이에 따른 퇴직 등이 없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국가와 기업이 생산성 향상 정책을 추진 중이라고 전하고 인적자원의 효율성 활용, 유능한 조직 구성원에 대한 존중, 인간 존중이 생산성 향상에 필수적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거시적 접근이나 거대 담론적 이해는 구두선에 그치기 쉽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따른 배려와 투자가 핵심이다. 기능주의적 접근과 해결책이 종국에는 실패하는 까닭은 그 중심인 인간, 즉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주최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과 삶이 조화되지 않는 삶은 불행하다. 일중독을 자랑하면 안 된다. 최고경영자들은 그게 자랑이면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자기만 망치는 게 아니라 조직을, 조직원들의 삶을 망친다. 직원들에게 시간만 때운다고 채근할 게 아니다. 자신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살아야 겨우 풍월을 읊는 흉내나마 낼 수 있는 서당 개가 될 수 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