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율은 기업이 영업 활동이나 자본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자본잉여금과 이익잉여금을 합한 전체 잉여금을 납입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이다. 유보율이 높으면 그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투자나 배당이 적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보율을 근거로 기업의 투자 부족을 질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유보율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유보율의 기준이 되는 잉여금에는 현금만 아니라 토지·공장·설비도 포함된다. 즉 기업의 잉여금이 단순히 ‘쌓아 놓은 현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극단적으로 따지면 공장을 짓기 위해 땅을 사들이더라도 ‘자본잉여금’으로 계산돼 유보율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부동산 자산이 많은 롯데, 장치산업의 성격이 큰 SK·포스코의 유보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이 2012년 말 한국 채택 국제 회계기준(K-IFRS)에 따라 유보율을 계산해 본 결과 2010년 말 기준 상장기업의 평균 유보율은 160%에 불과했다. 이유는 자본금 성격이 강한 주식 발행 초과금과 재평가 적립금을 기존처럼 잉여금이 아니라 자본금 항목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591개 비금융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제 현금 보유 비율은 8~9% 수준에 그쳤다. 삼성전자 빼면 모두 뒷걸음질
사실 기업인이라면 투자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삼성·현대차 등 국내 톱 그룹사를 제외하면 국내 대기업들의 경영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대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기업 경영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5월 2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매출액 500대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2504조 원으로, 전년에 비해 7.8%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38조 원으로 4.4% 줄었다. 당기순이익은 98조 원으로 7.8%나 줄어들었다.
500대 기업 전체 매출의 51.8%를 차지하는 정보기술(IT)·전기전자,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조선 등 5대 주력 업종 가운데 IT·전기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업종은 모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석유화학 업종은 매출이 349조 원으로 2.6%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절반인 10조 원으로 줄었다.
조선·중공업 업종도 매출은 151조 원으로 2%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6조 원으로 48.2% 줄었다. 철강은 매출이 7.5% 줄고 영업이익도 31% 줄었다. 반면 IT·전기전자 업종은 삼성전자의 선방에 힘입어 지난해 매출이 388조 원으로 18% 늘었고 영업이익은 36조 원으로 81% 급증했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5개 주력 업종 가운데 대부분의 업종이 성장 탄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기업의 경영지표를 분석할 때 꼭 따져보는 게 있다. 바로 ‘삼성전자 착시 효과’가 있는지 가려보는 것이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기업별 매출에선 삼성전자가 201조 원으로 압도적 선두를 유지했고 현대자동차가 84조 원, SK이노베이션이 73조 원으로 뒤를 이었다. 현대차와 SK이노베이션을 합쳐도 삼성전자에 못 미칠 만큼 압도적이다. 그룹별로 봐도 500대 기업 가운데 25개 회사가 포함된 삼성그룹이 전체 매출의 15%인 376조 원을 기록했다. 21개 회사가 포함된 현대차그룹은 전체의 9.7%인 243조 원을 기록했다.
대기업들의 상황은 올해 더 좋지 않다. 현대차의 1분기 매출은 작년 동기보다 6.0% 늘어난 21조3671억 원이지만 영업이익은 10.7%나 줄어 1조8685억 원에 그쳤다. 건설은 말 그대로 ‘악’ 소리가 나온다. GS건설은 1분기에 5355억 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삼성엔지니어링도 1분기에 2198억 원의 영업 손실을 봤다. 철강 업계도 부진했다. 포스코의 1분기 연결재무제표 기준 영업이익은 작년 동기보다 4.7% 감소한 7170억 원이었다. 현대제철은 매출액 2조7804억 원, 영업이익 1216억 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21.7%, 21.2%씩 감소했다. ‘정치적 리더십 필요한 때’
이처럼 기업의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살아날 희망’이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기업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외부 환경은 거의 최악이다. 먼저 민간 소비 위축 등으로 내수 소비가 침체됐다. 또 글로벌 경제 위기 여파가 아직 진행 중이다. 여기에 엔화 약세가 겹쳐 수출 환경도 악화됐다. 이에 더해 규제 중심의 경제 민주화 입법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 또한 확실한 경제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기업은 투자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최근 ‘장기 저성장 대응’ 보고서에서 국내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는 근본 원인이 기업의 고정 투자 부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연구소는 “최근 10년간 고정 투자 증가율이 연평균 1.6%에 불과해 성장 잠재력을 훼손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일부 기업을 뺀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이미 실적 악화, 투자 축소,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는 역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답은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통해 장기 저성장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 일본을 참조하는 것이다. 즉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본 내각부가 5월 16일 발표한 일본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전기 대비)은 0.9%. 작년 1분기(1.5%) 이후 4분기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이 정도의 속도로 GDP가 늘어나면 올해 연간으로는 3.5%의 성장률을 달성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경제성장에 속도가 붙자 일본 기업들은 최근 투자를 점차 늘리고 있다. 도시바는 올해 반도체 투자를 전년의 두 배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혼다도 올해 멕시코 공장에 4억7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계획을 포함해 전체 투자를 전년 대비 18%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전기 등 장비 업체들의 올 3월 수주는 전달보다 증가하는 등 투자 확대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전국 71개 상공회의소 회장들 모여 목소리를 낸 ‘공동 발표문’도 주목할 만하다. 회장단은 공동 발표문에 ▷과도한 노동·환경 규제 입법 자제 ▷규제 개혁 추진 ▷엔저 현상 적극 대응 ▷기업하기 좋은 조세 환경 조성 ▷지역 경제 활성화 등 5대 요구 사항을 담았다. 회장단은 “특히 규제개혁은 대규모의 재정 투입 없이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책 수단”이라며 “성장이 유망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보건·의료, 관광 등 서비스 부문에서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도록 규제를 완화해 국내외 자본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회장단은 “기업 경영 활동과 투자 의욕을 위축할 수 있는 투자와 고용에 대한 세제 지원 축소는 자제돼야 한다”며 “세수 확대와 조세 정의 확립 차원의 지하경제 양성화가 기업에 대한 과도한 세무조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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