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가 지령 900호 발행을 맞아 한국인 900명을 대상으로 지난 10년을 정리하고 다가올 10년을 가늠해 보는 특별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때마침 신임 박근혜 정부가 공식적인 깃발을 올렸다. 창조 경제와 경제 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다. 한국 경제가 또 한 번 새로운 출발선에 선 셈이다. 앞으로 10년은 인구학적으로 한국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과연 한국호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선진국 진입에 성공할까. 10년 후 한국을 이끌 대표 기업, 대표 CEO는 누굴까.
한국인 900명이 뽑은 10년 후 한국의 대표 기업·대표 CEO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3년 2월 월드컵 4강 진출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당시 경제 상황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경제성장에 탄력이 붙은 중국이 전 세계 철강 제품을 빨아들이면서 포스코가 대호황을 누렸다.

주택은행과 합병해 덩치를 키운 국민은행은 은행 대형화의 선두 주자로 각광 받았다. 지금은 적자의 늪에 빠져 있는 한국전력이 3조 원대의 순이익을 냈고 쌍용자동차도 렉스턴의 인기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붐을 타고 건설사와 시멘트 업체들도 전성기를 누렸다.

한경비즈니스가 선정한 ‘2003년 대한민국 100대 기업’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100대 기업 1위는 삼성전자다. 이어 한국전력·현대자동차·국민은행·KT· SK텔레콤·포스코·LG전자·기아자동차·KTF가 나란히 2~10위에 올랐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톱 10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6개 기업(삼성전자·현대자동차·KT·SK텔레콤·포스코·기아차동차)뿐이다.

한국전력은 원료 값 고공 행진과 전기요금 현실화 실패로 수년째 적자를 기록해 탈락했다. 국민은행은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주식시장에서 사라졌다. 스마트폰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LG전자도 실적 부진으로 순위에서 빠졌다. KTF는 KT에 흡수 합병돼 사라졌다.

100대 기업으로 범위를 넓히면 결과는 더욱 흥미롭다. 2003년과 2012년 100대 기업을 비교하면 생존율이 55%에 불과하다. 2003년 100대 기업 가운데 명단에서 사라진 기업은 모두 45개다. 그중 20개는 실적 부진으로 100대 기업에서 밀려났다. 앞서 언급한 한국전력과 LG전자를 비롯해 삼성SDI·대한항공·쌍용자동차·아시아나항공·하이트맥주·동국제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어 지주사 전환 또는 기타의 이유로 상장폐지된 곳이 10개, 인수·합병(M&A)으로 사라진 기업이 6개, 기업 명칭을 바꾼 곳이 9개다.
한국인 900명이 뽑은 10년 후 한국의 대표 기업·대표 CEO
2003년 100대 기업 중 45% 사라져

지난 10년간 벌어진 격변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휴대전화 시장이다. 10년 전만 해도 휴대전화 시장의 절대 강자는 노키아였다. 탁월한 공급망 관리 전략으로 세계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 거인을 무너뜨린 것은 뜻밖에도 애플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애플은 매킨토시 컴퓨터와 MP3 플레리어 아이팟을 만들던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시장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스마트폰 혁명의 희생자는 노키아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변화를 제때 따라잡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엇갈렸다. 국내에서 LG전자가 초기 전략 실패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통신사와 휴대전화 제조업체 사이의 ‘갑을’ 관계도 역전됐다.

기업 환경의 변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변화의 방향도 예측이 어려울 만큼 돌발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과거의 성공에 의존해 잠시 방심하는 사이 변화에서 뒤처지기 십상이다. 아무리 현재 위상이 탄탄하다고 하더라도 내일을 보장할 수 없다. 경영자로서는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다.

신장환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실패에 무너지는 기업, 실패를 밑거름으로 강해지는 기업’ 보고서에서 “기업의 운명은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계적 자동차 부품 업체인 보쉬는 실패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그 결과 수많은 실패를 밑거름으로 오히려 세계 그 어느 B2B 기업도 이루지 못한 위상을 유지하면서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다. 3M은 최근 4년 동안 시작한 사업이 전체 매출의 30%가 넘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고수한다. 실패를 일상화하지 않으면 지키기 어려운 사업 원칙이다. 유니클로의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 회장은 ‘9패 1승’ 전략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자가 연전연승했다면 그것은 새로운 것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꼬집는다.

신 연구원은 “변화하는 환경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책망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실패도 거쳐가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는 근성을 체질화하는 게 경쟁력을 높이는 더 현명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