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창성·문지원 빙글 대표

빙글의 창업자 호창성 대표와 문지원 대표는 오랜만에 만나는 부부 기업인이다. ‘빙글’이라는 회사는 분명 아직 스타트업이지만 창업자인 호창성·문지원 대표는 이미 한 차례 성공을 거두고 벌써 세 번째 창업한 베테랑 창업가들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한 차례 성공 후 세 번째 창업 나서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93학번인 호창성 대표와 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 94학번인 문지원 대표가 만난 것은 1994년 대학 연합 동아리 엠티(MT)에서였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생 호창성이 졸업 프로젝트를 제출했는데 이걸 본 서울대 고형석 교수의 한마디 말이 호창성의 인생을 바꿨다. “이거 창업하면 아주 잘되겠는 걸?”

도대체 뭐기에 고 교수가 창업을 독려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세컨드 라이프 같은 것이었어요. 아이디어는 분명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경험이 없었고 창업에 대해 무지했죠.”

어쨌든 두 사람은 우연히 2000년 2월 회사를 시작했다. 소프트웨어진흥원의 창업진흥센터에 당당히 입주하기도 했다. “센터에 입주하자마자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는데 그렇게 생각할 법하더라고요. 그 당시엔 매일 들려오는 말이 어떤 회사가 몇 십억 원을 투자받았다는 둥, 주식 가치가 몇 백억 원이 됐다는 둥 그런 얘기가 넘쳐났거든요.”

그리고 채 두 달도 안 돼 버블이 꺼졌다.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투자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막해져 버렸다. “그 뒤로 외주도 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별걸 다 했죠. 사업 방향도 틀었어요. 세컨드 라이프처럼 만들기 위해선 돈이 너무 많이 필요했는데 당장 운영비도 없었거든요. 다행히 이걸 아바타 관련 사업으로 전환했는데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문 대표의 설명이다.

자금난은 계속됐고 사업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버블이 꺼지고 3년을 버텼지만 한계가 왔다. 결국 이들은 회사를 헐값에 넘겼다. 그러고도 부채가 남았다. 1억 원이 넘었다. 당장 빚을 갚기 위해 기업체에 취직이라도 해야 했다. 결국 2003년 호 대표는 한화리조트에 취직했다.
[한국의 스타트업] 한 차례 성공 후 세 번째 창업 나서다
암흑기에 피어난 희망

자기 사업을 하던 사람이 답답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의외로 일은 재밌었다. “신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는데,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시도하는 게 나름대로 재밌었어요.” 호 대표의 말이다.

반전은 아내로부터 왔다. “창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슬금슬금 드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할까’ 하다가 제 전공을 생각하게 됐죠. ‘교육 쪽 시장이 크지 않을까.’ 그런데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남편한테 선언했죠. 나 유학 갈 거라고.”

그 말을 듣고 한편 깜짝 놀랐지만 이내 뜻이 통한 남편 호창성. 이왕 가는 것 같이 가자고 했다. 아내는 사업 아이템을 찾고 남편은 경영을 더 공부해 최강의 콤비 체제를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준비를 먼저 시작한 문 대표가 먼저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교육공학. 이어서 호창성 대표도 스탠퍼드 MBA 유학길에 올랐다. 문 대표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면서 콘텐츠와 학습의 접목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엔 모두들 관심이 많잖아요. 그런데 사실 고급 과정에서는 영어권에서 생활해야 실력이 향상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죠. 그래서 ‘가상의 콘텍스트(context)에서 가상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잘 활용하면 놀면서 학습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게 문 대표의 생각이었다. 자막을 만드는 사람은 공부도 하면서 재미있는 문화를 즐길 수 있고 누리는 사람은 자막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어 어려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문제는 ‘저작권을 해결할 적법한 콘텐츠를 얼마나 조달할 수 있느냐’였다. 2007년 실리콘밸리에서 비키를 창업하고 일단 공개된 콘텐츠에 대한 번역을 하면서 유저들의 반응을 살폈다. 유저들은 확실히 드라마나 영화에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유튜브에 공개된 콘텐츠만 갖고 번역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콘텐츠를 확보하려고 방송사를 찾아갔다가 핀잔만 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이들은 이번엔 제작사를 찾아갔다. ‘꽃보다 남자’ 제작사인 그룹에이트를 방문, 저작권을 해결한 콘텐츠를 처음 따냈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드라마가 나가고 1시간 안에 자막이 완성됐고 24시간 안에 36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하지만 고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사이트를 운영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사용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기술적인 부문의 투자와 보완도 필요했다. 금융 위기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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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의 힘

그런데 이번엔 첫 창업 때와 다른 일이 생겼다. 100만 명에 달하는 이용자들이 ‘비키 살리기’ 운동을 자발적으로 하면서 한 달에 1000만 원씩 돈을 모아 회사에 보내준 것이다. 1년 가까이 이용자들의 도네이션에 힘입어 비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2009년을 보내고 2010년 드디어 430만 달러에 달하는 투자 자금을 유치하게 된다. 이어 2011년에는 1800만 달러를 투자 받으면서 완전히 거듭나게 된다. 2010년 투자와 함께 호 대표의 스탠퍼드 MBA 동기생인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라즈믹(Razmig)이 비키 최고경영자(CEO)로 오게 된다. 그는 NBC유니버설 출신으로 콘텐츠 사업인 비키를 위한 최적의 인물이었다. 라즈믹을 영입하고 호창성·문지원 두 대표는 경영에선 한 발 물러나게 된다.

이 부부가 천생 창업가인 것은 비키로 성공을 거둔 뒤에도 가만있지 않았다는 것. “비키는 이용자들이 번역된 자막을 만드는 시스템이었죠. 돈을 받지도 않는데 그렇게 노력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건 팬으로서의 열정 때문이에요.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모이고 비키를 살리기 위해 기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뭔가를 좋아할 때 힘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고 제대로 해 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이 처음에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키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 등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커뮤니티가 됐다. 이게 꼭 영화 등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팬이 생길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티 플랫폼을 만들면 된다. 이런 생각에서 2011년 11월 ‘빙글’을 설립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관심사가 있게 마련이다. 이걸 공유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그런데 페이스북처럼 자신과 다양한 친분이 있는 이들이 모여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선 이것을 제대로 해소하기 힘들다. 그 안에서 별도의 방을 만들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주된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빙글은 관심사 기반 네트워크로 만들어졌다.

빙글의 웹 서비스는 2012년 7월 시작됐다. 연예·스포츠·정보기술(IT) 등 관심이 있는 분야에 글을 올릴 수 있다. 크게 ‘카드’와 ‘파티’로 구성돼 있다. ‘카드’는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다. 주로 사진 기반 SNS처럼 사진·영상 등을 짧은 글과 함께 올린다. ‘파티’는 주제별로 모임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안드로이드 버전 애플리케이션은 2월 중에, 아이폰 버전은 3월 중에 출시된다. “‘관심사로 세상을 잇는다’가 빙글의 모토예요. 관계를 단순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관심사를 기반으로 인간관계의 새로운 차원을 형성하고 싶습니다.”



임원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onkis@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