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남매의 장남인 필자로서는 그 말의 무게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경제학의 귀신에 씌어 부모를 봉양하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거의 외면하고 살았으니 어떤 변명인들 통하겠는가.
지금이야 공직이 연봉도 많고 안정적이어서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지만 아버지가 재직하던 1960~1970년대에는 박봉이었고 물가마저 매년 20~30%나 뛰었다.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어도 살림살이가 풍족하지는 못했을 터인데, 아버지는 두 차례나 병원 생활을 하셨다.
내가 중학생이던 때 처음 발견된 위암이 고등학생이던 때에 재발해 병원에서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버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스스로 이겨내셨다. 당시는 제법 부자일지라도 병원 생활을 몇 개월만 하면 살림살이가 거덜이 난다던 때였으니 넉넉지 못했던 우리 집안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빚에 시달리면서도 아버지는 내 대학 생활을 뒷바라지해 주셨다. ‘아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그동안의 고난을 위안 삼으셨다. 그런 아버지께 나는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고 조기 퇴직을 단행함으로써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안정적인 직장도 없이 경제학 연구에 미쳐 30여 년의 젊은 시절을 흘려보냈다. 귀신에 홀린 듯이 말이다. 경제 현상을 좀 더 잘 읽어낼 경제학을 만들어 보자는 게 필자의 소박한 심정이었지만 그것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었다.
토마스 쿤이 지적했듯이 패러다임 혁명은 약 200년을 주기로 일어난다고 하니 그 과정이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실마리가 찾아졌다 싶으면 더 심하게 얽히고설킨 부분이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그럴수록 필자는 경제학 연구에 더 빠져들었고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난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그 고통을 직접 당한 것은 부모님과 처자식이었다. 부모님과 처자식은 물론이고 내게 잔뜩 기대를 걸었을 동생들에게도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때 모처럼 고향집에 찾아가면 골방 하나가 내 차지였다. 웃음이 만발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나는 한 번도 함께 즐기지 못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거의 전부였다. 처갓집에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게 내 성격 탓이려니 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KBS ‘TV특강’에 출연한 뒤 고향집에 들렀을 때 “노인정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 방송을 봤다”면서 “네가 할 효도는 그것으로 다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슴 아파하는지 아버지는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냈고 그 말씀은 지금까지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어쩌면 아버지는 학문 연구에 몰입했던 내 인생을 함께 사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깊이 모를 사유에 종종 빠져들곤 하는 내 습성은 아버지를 꼭 닮았지 않은가. 연세가 90을 넘으신지라 거동도 불편하고 정신도 예전처럼 맑지 않으시지만 부디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원해 본다.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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