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9일 찾은 충북 괴산군 감물면 박달마을. 농한기를 맞아 한갓진 시골의 겨울 풍경 그대로다. 농가 담벼락에는 우거지가 마르고 있고 허리를 구부린 동네 어르신은 밭둑에 자란 잡목을 쳐내고 있다. 그 틈새로 아담한 벽돌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귀농 11년 차 이우성(51)·유연숙(47) 씨 부부와 두 아들 인재(22)·인안(18) 군의 보금자리다.

이 씨 가족을 농촌으로 이끈 것은 이 씨의 진실한 삶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 야근에 아내 유 씨의 말마따나 집은 점점 하숙집이 되어 갔다. 바쁜 일상에 지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야말로 돌파구가 필요했다. 아내 역시 사내 아이 둘을 전담해 키워야 하는 삶에 지쳐 있었다. 그러던 2002년 이 씨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가족 모두 충북 시골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행복의 조건] 시골살이 11년 차 이우성 씨 가족 “내가 내 삶의 주인 돼야 즐거운 법”
[행복의 조건] 시골살이 11년 차 이우성 씨 가족 “내가 내 삶의 주인 돼야 즐거운 법”
소중한 것은 한 뼘 곁에 있다

“대개 그렇듯 주어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마흔 이후에는 내가 내 삶을 설계해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어요. 또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죠. 그것은 땅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시골로 내려왔죠. 아파트 평수, 월급, 직위 이런 것을 모두 내려놓고 나와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어요.”

시골로 내려와 처음 몇 년은 정신없었다. 집 짓고, 마당 꾸미고, 밭 가꾸고, 이웃 사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기에 불편하고 낯선 시골살이를 시작한 두 아들을 챙겨야 했다. 부부는 두 아들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산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드는 데 애썼다. 숨바꼭질하는 날, 플러그 뽑는 날, 돈 안 쓰는 날, 시장 보는 날 등 날마다 프로그램을 짜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에 열심이었다.

“아이들이 작은 것 하나를 보더라도 따뜻한 눈길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면 ‘사회를 보는 눈길 역시 따뜻해지지 않을까’,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지천에 널린 물·돌·바람·햇빛 이런 자연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죠. 어려서부터 자연에서 키우면서 이러한 소중함을 스스로 알아가게끔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귀농 이후 이 씨 가족은 점차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귀농만큼은 극구 손사래 치던 아내 유 씨는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불편하고 힘들다던 시골살이도 슬슬 적응해 요즘은 이 씨 만큼이나 바쁘게 산다. 자신의 주 전공인 바느질을 하며 동네 아낙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거나 협동조합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1주일에 한 번은 가드닝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처음에는 견디지 못해 보따리 싸서 서울로 몇 번 달아난 적도 있어요. 농사일도 싫고 남편 찾아 내려오는 친구들 뒤치다꺼리도 싫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여기 사는 게 좋아요. 좋아하는 바느질도 하고, 민요도 배우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지낼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남이 들으면 ‘뭘 그런 걸 다 행복해 하느냐’고 할 만큼 시골살이의 매 순간을 행복해 하면서 삽니다.”

귀농 또는 귀촌한 아내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막연히 남편 따라 시골살이를 하게 되면 아내의 인생은 남편이 싫어서 도망친 ‘주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연도 좋고, 행복도 좋다지만 사실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대책은 필요했다. ‘적게 벌어 알뜰하게 만족하며 살자’는 게 이 씨의 주의지만 이것도 말 그대로 적게나마 돈벌이가 될 때 하는 말이다.

농부가 된 이 씨의 연봉은 400만 원 정도였다. 아끼고 줄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2010년 이 씨를 포함한 귀농자 두 명과 토박이 농민 한 명이 모여 품앗이 형태로 농사를 짓다가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의 ‘농사 공동체’를 꾸렸다. 각자 소유한 땅을 하나로 통합해 약 6600㎡(2000평)에 함께 농사를 지어 수익금을 균등하게 나누는 구조였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다. 농업·회계·판매 마케팅의 베테랑 세 명이 모이니 시너지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각자에게 돌아가는 연 수입이 1500만~2000만 원쯤 됐다. 그전 400만 원에서 크게 늘어난 금액이다. 일이 잘되면서 쉴 틈 없이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다람쥐 쳇바퀴 인생이 시골에서 다시 시작된 것만 같았다.
[행복의 조건] 시골살이 11년 차 이우성 씨 가족 “내가 내 삶의 주인 돼야 즐거운 법”
‘밥상 자급화’의 즐거움

“아차 싶었어요. 농사를 좀 잘해 보려던 것이었는데 어쩌다 일에 중독돼 다시 가정도 돌보지 못하고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골에 와서 여유와 가정의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데 또 본질은 뒷전에 가 있었던 거죠. 또 딜레마에 빠졌어요. 그래서 작년에 개별 농장으로 다시 바꾸면서 품앗이 형태로 돌아갔어요.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죠.”

그 사이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됐다. 아빠가 농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농부라고 말한다. 현재 군 복무 중인 큰아들은 농업 유통을, 고3을 앞둔 둘째는 환경 조경을 미래의 꿈으로 키워가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아내 유 씨는 ‘먼 곳까지 왔는데 대접할 게 없다’며 취재진에게 밥상을 내어줬다. 전형적인 시골 인심이다. 손수 담근 메주로 만든 구수한 청국장에 노란 배춧속, 알싸한 총각무, 속이 뻥 뚫리게 시원한 백김치, 오독오독 씹히는 무말랭이 무침 등 내놓는 반찬마다 직접 길러낸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이 씨가 말하는 ‘밥상 자급화’, 부부가 귀농해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예나 지금이나 손님이 오면 내 손으로 키워 반찬으로 만든 것을 나열하면서 뿌듯해하는 것을 제일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기른 농작물로 만든 반찬으로 밥상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귀농의 제일 큰 즐거움이죠. 비로소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한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고 있다는 아비의 의무감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씨는 “시골살이는 사계절 옷을 갈아입는 산하를 느끼며 세월을 낚는 것”이라고 했다. 떼 지어 나는 철새들의 군무를 보며 감탄하고 마당을 거실로, 산과 들을 정원으로 생각하는 느긋함이 있다. 팔십이 넘은 어르신들이 경운기를 끌고 다니며 농사짓는 건강도 있다. 선택한 귀농이 일생에 걸쳐 잘한 일 중 으뜸이라면서 뽐내는 이 씨 가족의 인생에서 행복이 느껴진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