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에서 소규모로 한우를 키우는 아버지는 평생 한우 기르기에 전념하셨다. 소와 평생을 같이하신 분이다. 아침 저녁으로 소들의 여물을 챙기고 발육 상태, 질병 등을 관리하느라 남들이 다 가는 그 흔한 동남아 해외여행 혹은 국내 1박 2일 여행도 생각지 못하고 사셨다.

서울에 있는 자식을 보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한 번 정도 오실 법도 한데 ‘그럼 소 밥은 누가 주느냐?’는 이유로 한 번을 못 오시고 있다. 일흔이 넘은 연세에 일을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는 법이 없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고 강변하신다. 소처럼 우직하게 한길만 바라보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성실함과 우직함이 오늘의 나를 키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별명은 ‘한우 박사’다. 시골 인근 동네 사람들은 갑자기 소가 아프거나 하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찾았다. 비싼 수의사 왕진료도 문제였지만 오랫 동안 한우를 키우면서 쌓은 아버지의 경험과 노하우가 종종 수의사의 처방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소가 소화불량으로 배에 가스가 차면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마시게 하기도 하고 보리로 만든 엿기름을 먹이거나 가을날 잘 여문 호박을 넣어 영양가 있는 소죽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종종 나는 아버지의 신기한 처방에 호기심이 들어 아버지에게 물으면 한마디만 하셨다. ‘소나 사람이나 똑같아’라고만 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 이름 대신 ‘한우 박사’라고 하셨고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아! 나의 아버지] 한우 박사가 키운 지역학 박사
2000년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유학을 결심할 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은 도움이 됐다. ‘아버지가 박사인데 나도 박사가 되겠다’는 말을 실현하기로 했다. 영국 유학을 결심하고 막대한 유학비 등 경제적인 문제를 상의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많은 선진국들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제공했던 장학금이 사라졌고 결국 향토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아내와 함께 가는 유학길이어서 경제적 부담이 더욱 가중됐고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신세였다.

대충 필요한 유학비와 생활비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계셨다. 단지 ‘남자가 결심이 섰으면 해야지, 대신 소처럼 한길로만 가’라고 한마디만 하셨다.

그 한마디를 뒤로하고 김포 공항에서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긴 여정을 떠났다. 장기간의 유학 생활에 대한 불안함, 경제적인 문제 등의 고민이 늘 따라붙었고 그때마다 뒤에서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한우 박사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종종 자극제가 됐고 그에 용기를 얻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지역학 박사가 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인천 공항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6년 동안 한 번도 들어오지 못했던 달라진 서울의 모습에 놀라면서 공항에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내가 처음 물어본 말은 ‘아버지 소들 밥은?’이었다. 아버지 박사와 아들 박사가 공항에서 6년 만에 만나 묻는 안부치곤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시며 미소 짓는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정겨웠다.


하상섭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