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 큰 정미소를 경영하셨던 아버지와 한학자의 딸로 한학에 학식이 높았던 어머니를 부모로 둔 나는 6남 4녀 중 장남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기 위해 부산에 있는 숙부님 댁으로 간후부터 멀고 긴 독립의 길이 시작됐다.

대도시 생활에 적응하는 방법은 내 고향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도시에서의 첫해인 중학교 1학년 생활은 암흑에서의 생활과 같았다. 성적도 엉망이었다. 그런데 방학 때 집에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하면 언제나 한마디, ‘모든 것은 니(네)가 알아서 해라’뿐이었다.

아버지와의 첫 대화는 언제나 ‘모든 것은 니(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무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야 아버지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암흑기에 당신께서 가족을 돌보고 살아남은 경험에서 나온 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것은 니(네)가 알아서 해라.’ 이 말 한마디가 우리 형제자매 10명을 강하게 키운 비결이 됐다. 그리고 다른 한마디는 ‘니(네)는 괜찮나?’였다.

한번은 정미소가 잘된다(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나면서 끊임없이 모함이 이어졌다. ‘그 정미소는 되(곡식 등을 세는 단위)를 속인다(부정하게 도정료를 많이 받는다)’고 주위 사람을 부추겨 사람들이 떼를 지어 행패를 부리러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계를 조작해 부정한 방법으로 쌀을 뒤로 빼돌린다고 주장했다. 정미소 운영에 최대의 위기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 아버지는 그들이 주장하는 기계를 해체해 보여줬다. 결과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거짓으로 판명됐다. 아버지의 정미소 경영 철학은 ‘정직’이였다.

형제가 많으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한 여동생은 말괄량이처럼 남자 또래와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번은 한 남동생이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크게 싸우고 집에 돌아왔다. 맞았는지 때렸는지 다리에 상처가 심했다. 조금 있으니 싸운 학생의 부모와 주먹들로 보이는 사람 10여 명이 몰려와 동생을 내어달라고 협박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 데려가 그놈(동생)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동생을 주저 없이 그들에게 인계했다고 한다. 싸운 학생의 부모는 이를 보고 오히려 동생에게 자기의 아들을 잘 부탁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담하고 원칙 있는 판단으로 인심도 얻고 일도 잘 처리했다.
[아! 나의 아버지] 모든 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우리 집은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가볍게 방문한 이웃이든 누구든 식사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함께하는 것도 우리 집 전통이었다. 이웃의 관혼상제는 작은 정성이라도 성의를 표시하고 어떤 이유로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라도 챙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의 조화 개수가 182개였다는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후 몇 년 뒤 어머니도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 장례식 때 세어 본 조화는 222개였다. 이 조화 개수는 부모님이 원칙대로 살고 가셨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어머니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며 기회균등의 원칙으로 우리를 키웠다. 나는 어머니의 교육 철학에 따라 아버지가 남겨 놓은 재산을 형제자매 10명에게 균등 배분했다. 아버지 어머니, 2012년 11월 25일 묘사(墓祠)에 뵙겠습니다. 큰아들 올림.


이국헌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