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시 학원은 교육의 마지막 보루다. 그곳에는 못 배운 설움에 가방끈을 조여맨 주부와 만학도들이 생활의 고단함을 잊은 채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교육의 마지막 보루, 신설동 검정고시 학원을 찾았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사회가 발전할수록 음지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검정고시 학원은 교육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없어지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요.” 아직도 검정고시를 보는 사람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설동 수도학원 지대식(62)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

지 선생의 대답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검정고시 통계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고입 검정고시 응시자 수의 차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늘었다.

2008년 1회 응시자는 1950명, 합격자는 1378명이었다. 올해 1회 고입 검정고시 응시자는 2032명이고 합격자는 1585명이다. 합격률은 2008년 70.6%에서 올해 78%로 높아졌다. 응시자도 합격률도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검정고시 학원은 줄었다. 과거 신설동 로터리는 검정고시 학원의 ‘메카’였다. 수도학원뿐만 아니라 고려학원·국제학원·청운학원 등이 신설동 로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81년 미아리에서 신설동으로 제일 먼저 수도학원이 터를 옮겼다.

당시 시내 중심부에는 학원을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중심부에서 비교적 가깝고 교통이 편한 신설동에 학원가가 조성됐다. 하지만 2012년 현재 남아있는 검정고시 학원은 수도학원뿐이다. 다른 학원들은 장소를 옮기거나 입시 학원으로 ‘업종’을 바꿨다.

검정고시 학원 수입으로는 건물 임대료는 물론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학생들이 검정고시 학원의 주요 수강생인데, 그들에게 비싼 학원비를 요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신설동 주름잡는 수도학원 재단

현재 신설동에는 수도학원·진형중고등학교·남서울전문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모두 같은 수도학원 재단이다. 수도학원은 주로 검정고시를 담당하고 진형중고등학교와 남서울전문학교는 주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검정고시는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하지만 주부학교는 2년 동안 출석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2년 안에 중학교·고등학교 졸업장을 모두 받으려는 사람들은 검정고시를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부학교에 진학한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검정고시 학원보다 주부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검정고시 학원은 줄었지만 검정고시생 숫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학비’ 때문이 아니라 ‘성적’ 때문에 검정고시를 택하는 청소년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재학생 중 내신 성적을 올리려는 학생들이라든지 외국 유학을 갔다 온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 선생은 “성적 때문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보다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직은 더 많다”며 “검정고시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생기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검정고시의 주요 응시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보통 나이가 많은 ‘만학도’이거나 주부 그리고 학교를 중퇴한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주로 새벽반과 야간반 수업을 듣는다.

새벽반은 오전 6시 30분부터 시작하고 야간반은 오후 6시 반부터 시작한다. 주중에는 직장에 나가거나 집안일을 한다. 아예 새벽반과 야간반을 번갈아 다니면서 집안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주부 수강생도 있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또 다른 한 수강생은 2년 동안 신설동 근처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올해가 돼서야 학원에 등록했다고 털어놓았다. 2년 동안 수도학원 입구에서 멈칫거리며 ‘나이가 먹었는데 이제 와서 공부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어렵게 수업에 들어갔고,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보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고 말했다. ‘못 배운 사람’이라는 낙인이 그에게는 너무나 큰 콤플렉스였기 때문이다.

진형중고등학교의 한 관계자는 “여기 있는 분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을 쓰신다”며 “언론 등에 알려져 자신이 노출되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한 주부 수강생은 남편에게 ‘고졸’이라고 속였다가 학원 졸업식이 돼서야 ‘사실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이런 만학도들의 수업 태도는 ‘최상급’이라고 검정고시 학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만학도들은 보통 학급의 ‘반장’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올해 4월 실시됐던 대입 검정고시에서 최고령으로 합격한 최복석(81) 씨는 수도학원에서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아침에 가장 일찍 나와 교실을 정리하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교실의 불을 다 끄고 칠판 지우기를 담당했다.

지 선생은 “연세가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셔도 끝끝내 그렇게 다 하셨다”며 “다른 학생들에게 매우 모범이 되는 분이었다”고 전했다.

검정고시의 또 다른 주요 수강생은 ‘학교를 중퇴한 학생’들이다. 지 선생은 “학교에서 문제아라고 낙인 찍혀 소위 ‘퇴학’당한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보곤 한다”고 말했다.

학교에선 최고 문제아로 찍혔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열심히 배우는 기특한 학생들’이라는 게 학원 선생들의 총평이다.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보다 문제아였던 학생들이 검정고시 합격 이후 더 많이 찾아오고 더 자주 연락한다고 지 선생은 전했다.

검정고시 학원은 일반 학원보다 ‘학교’에 많이 가깝다. 반별로 소풍도 가고 담임선생님도 있으며 상담 시간을 따로 두기도 한다. 검정고시 학원 선생은 과거 야학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많다.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사명감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검정고시 학원 선생들은 말한다.

이 때문에 ‘문제아’들도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다. 지 선생은 “아이들에게 항상 ‘현재 네가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려준다.

선생으로서는 제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편’보다 ‘존경’이 앞선다고 지 선생은 전했다.

한번은 지 선생의 제자로 88세 할머니가 들어오셨다고 한다. 우연히 지 선생이 육교를 지나다가 그 할머니가 교회 주보를 나눠주는 걸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는데 할머니께서는 “누구세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수업을 여러 번 했는데 담임선생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 선생은 “섭섭한 마음이 든 게 아니라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감퇴하는 게 당연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며 “나이 드신 분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최근에는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들이 수도학원에 수강 등록을 한다. 새터민은 국가에서 학비를 50% 지원해 준다. 많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싶어 하는 새터민들이 수도학원에 찾아와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지 선생은 전했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점심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

검정고시 학원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나고 무엇을 할까. 신설동은 여느 ‘학원가’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우선 그 흔한 스파게티 가게가 없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할리스’가 유일하고 다방이 더 많다. 음식 종류는 설렁탕·보신탕·순댓국 등이다. 아무래도 ‘청소년’ 입맛보다 ‘장년층’ 입맛이다.

하지만 학원 수강생들은 이런 음식점에 자주 가지 않는다. 신설동 근처 설렁탕집 주인은 “학원생들이 오긴 하는데 정말 가끔 무리 지어 ‘회식’하는 느낌으로 오고 그렇지 않으면 학원생이 주요 소비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검정고시 학원생들은 주로 ‘도시락’을 싸서 온다. 수도학원 안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어 학생과 선생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한 푼이 아까운데 어디 외식을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가끔 ‘회식’은 있다. 주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업이 끝난 뒤 설렁탕집 등에 가기도 한다. 한 주부 수강생은 “항상 밥상을 차려만 주다가 누군가 차린 음식을 먹으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며 “게다가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동료들과 같이 얘기하며 밥을 먹으면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다”고 전했다.

대다수의 수강생이 수업 후 하는 일은 ‘방과 후 자율 학습’이다. 물론 검정고시 시험에 관련된 자율 학습이다. 하지만 그 외에 수강생들끼리 모여 컴퓨터나 영어 수업을 수강하기도 한다. 수도학원에서 단과 수업을 듣거나 근처 남서울전문학교에서 관련 강좌를 듣는 식이다. 실제로 수도학원에는 ‘학업’뿐만 아니라 댄스 교실과 같은 ‘레크리에이션 강좌’도 개설해 놓은 상태다.

수업과 자율 학습이 끝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다. 지 선생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라에서 조금만 지원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며 “초·중·고 무상 급식도 좋고 무상 보육도 좋은데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조금만 눈길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인 곳, 신설동이야말로 ‘대학으로 가는 길’에 딱 맞는 ‘대학로’다.
[‘진짜 대학로’ 신설동의 진화] 큰 학문을 하는 사람들 ‘북적’… 교육의 마지막 보루
이후연 기자 leewho@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