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내부의 적

아놀드 토인비는 말했다. “그 어떤 외부의 도전도 내부적으로 강하면 물리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망했지만 그 원인은 한결같다. 바로 ‘내부의 적’이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알아도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자(CEO)도 ‘내부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전력 기기를 생산하는 A사 공장에 모기업 간부 2명이 방문했다. 그들이 A사를 방문한 이유는 이렇다. 새로 부임한 CEO가 6시그마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간부들에게 1인당 1건씩 사내 문제점을 6시그마 기법으로 해결한 뒤 성공 사례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

간부들은 단기간에 6시그마 교육을 받았지만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어 납품 업체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간부들은 A사에 안건을 줄 테니 6시그마 기법을 통한 모범 답안을 만들어 달라고 매달렸고 A사는 데이터가 없는 데다 프로세스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간부들은 “A사에서 실시한 내용 중 간단한 것 2개의 테마만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A사의 사례를 그대로 가져가 용어만 살짝 바꿔 제출했다고 한다. 물론 회사의 실적으로 잡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례에 등장하는 국내 굴지의 모기업은 거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외부에 의뢰해 6시그마 과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CEO는 실적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겠는가.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본래 취지는 좋았지만 결과가 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총론 지식만 가진 채 혁신 활동을 밀어붙인 모기업의 CEO가 전형적인 ‘내부의 적’인 것이다.

어느 전자회사의 CEO는 영어를 잘했다. 이 때문에 C 레벨(직능 부문의 최고 경영자)에 속하는(CMO, CPO 등) 경영진을 외국 유수 기업의 경력을 가진 외국인으로 영입했다. 어느 날 구매 부문 최고 책임자(CPO)가 호텔에서 전체 협력 업체 사장을 모아 거창하게 구매 정책과 방향, 애로점 등의 대화를 위해 협의회를 열었다.

CEO의 유창한 영어 연설을 시작으로 외국인 구매총책임자(CPO)가 영어로 설명했다. 회의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질문 하나 없이 끝났다. 회의가 끝난 뒤 협력 업체 사장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어 ‘마치 꿈속에 있다가 나온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래서야 무슨 회의가 되겠는가. 지방에 근무하는 협력 업체 사장들이 이틀이나 일을 못하고 서울까지 올라왔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적·금전적 손실이 발생했겠는가. 이런 행사를 추진한 CEO나 CPO가 ‘내부의 적’인 것이다.

물론 취지는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부가가치가 없는 일(Non Value Added)을 만든 것이다. 슈퍼 스피드(Super Speed) 시대에 이런 CEO가 큰 조직을 이끌었으니 스마트폰의 등장에 따른 외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회사를 어려운 상황의 길로 몰아넣은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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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TV 자주 출연하면 교체 시기

‘내부의 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경과해야 알 수 있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조직의 기본이 얼마나 확립돼 있느냐에 따라 ‘내부의 적’이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는 ‘내부의 적’으로 생각했던 노조가 ‘내부의 우군’으로 바뀐 사례다. 현대차는 오래전부터 강성 노조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필자를 쳐다볼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계속되는 노조의 파업과 농성으로 현장 근로자의 임금이 인상되고 이에 따라 전 직원들의 연봉이 올랐다. 생산직보다 기술 사무직의 연봉을 적게 줄 수 없기 때문에 노조의 임금 인상은 사무 기술직이나 연구원의 연봉 인상 효과로 이어졌다.

높은 연봉을 받는 사무 기술직이나 연구원의 이직률이 예전보다 뚝 떨어졌다. 이는 기술 축적과 연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현대차는 파업이 매년 반복되는 탓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생산기술이나 자동화에 대해 부단하게 노력했고 미국에 진출해서도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과 경쟁하며 선두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인원 변동이다. 인원 변동이 없는 안정된 조직이어야 노하우와 기술이 축적된다. 따라서 현대차의 우수한 생산기술과 자동화는 잦은 파업에 따른 생산성 저하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현대차가 ‘기본 체력’이 약했다면 극심한 노사분규와 급격히 상승하는 임금 인상에 따라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게 됐을 것이고, 노조는 ‘내부의 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부의 우군’으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기본’은 중요한 것이다.

‘내부의 적’은 기업 멸망 1순위에 속한다. ‘내부의 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점차적으로 전 조직이 휴브리스(Hubris: 오만)가 만연해지면서 관료주의가 되고, 다음은 ‘변하기 싫다’는 환경으로 급변한다.

‘변하기 싫다’는 분위기가 점점 심해지면 ‘보여주기 위한 혁신 활동’, 즉 ‘겉보기 혁신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기업 내 모든 업무는 보여주기 위한 활동으로 전락한다. CEO는 외부에서 “내가 해서 이렇게 잘됐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내막을 잘 모르는 외부 사람들은 혁신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효과가 무척 큰 것으로 오해하게 돼 대단한 경영자로 착각해 칭찬을 쏟아낸다. 칭찬에 도취한 경영자는 경영을 뒷전에 두고 더욱 외부로 돌기 시작한다.

이미 이런 경영자는 ‘내부의 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그 기업은 틀림없이 몰락하거나 유명무실해진다. CEO가 외부 강연을 하기 위해 출타가 잦고 TV에 자주 등장하면 이 CEO는 교체 시기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회사든 장기적으로 이익을 내고 규모가 커질수록 휴브리스에 감염돼 관료주의 조직이 되는 ‘대기업병’에 걸리게 되어 있다. 휴브리스는 ‘관료주의 조직’을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적’은 전략적 이동(Strategic Move)을 방해해 회사를 몰락의 길로 유도한다.

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기존의 업(業) 자체를 잘 끌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새로운 업(業)을 향한 전략적 이동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도래했다. 예컨대 노키아의 멸망 원인은 ‘내부의 적’으로 변한 일부 경영진 때문에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신속히 ‘전략적 이동’을 못했기 때문이다. 필름 산업의 아그파 또한 같은 상태로 멸망했다.

아그파는 1889년 흑백필름을 개발했고 1936년 세계 최초로 자동 노출 기능을 가진 사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내부의 적’ 때문에 전략적 이동에 실패했다. 코닥도 세계 1위의 필름 회사였으며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고 세계 최고의 브랜드였으며 특허가 많아 특허 사용료만 받아도 먹고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또한 ‘내부의 적’ 때문에 ‘전략적 이동’ 실패로 망했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성공에 따른 자만’과 ‘성공의 학습 효과’ 때문에 성공을 이룬 분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쌀독에 빠진 쥐처럼 변화 없이 독 속에서 안주하는 자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망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누가 우리 회사의 ‘내부의 적’인지, 혹시 우리 ‘경영자 중 내부의 적’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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