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금융 위기 이후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계속된 경기 회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지표상으로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발표됐던 2분기 성장률이 잠정치인 1.5%보다 0.2% 포인트 낮게 확정됨에 따라 경기 부양책 무용론과 함께 일본처럼 ‘장기 침체화(Japanization or Japan-style recession)’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일부 경제지표가 호조세를 보이지만 미국 국민들의 체감 경기가 개선되지 않는 것은 향후 미국 경제의 앞날을 더 불투명하게 하는 요인이다. 체감 경기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지표인 경제고통지수(misery index)를 보면 소비자물가가 안정됨에 따라 외형상으로 개선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실업률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는 추세다.

시장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팻 테일(fat-tail) 리스크 장세’가 증시뿐만 아니라 금을 비롯한 상품 시장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향후 금융시장과 경제 상황을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재정절벽(fiscal cliff) 등 팻 테일 리스크가 여전히 많은 상황이다.

최근 들어 정책의 최후 보루 역할을 맡고 있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의 입지에 변화 조짐을 보이면서 미국 경제가 앞으로 일본 경제처럼 ‘5대 함정’에 빠져 ‘잃어버린 10년’을 겪을지 모른다는 ‘일본화(Japanization)’ 우려가 해소되지 않은 원인이다. 5대 함정으로는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경기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책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YONHAP PHOTO-1077> Workers walk through a new Wal-Mart store in Chicago, January 24, 2012. The store will open on January 25, and it will be Wal-Mart's largest outlet in Chicago. REUTERS/John Gress (UNITED STATES - Tags: BUSINESS)/2012-01-25 10:54:00/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Workers walk through a new Wal-Mart store in Chicago, January 24, 2012. The store will open on January 25, and it will be Wal-Mart's largest outlet in Chicago. REUTERS/John Gress (UNITED STATES - Tags: BUSINESS)/2012-01-25 10:54:00/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돼 예측 기관들의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금융 위기 발생 4년 차를 맞은 미국 경제의 움직임을 보면 5대 함정과 이에 따른 ‘일본화’ 우려가 충분히 나올 만한 상황이다. 2009년 2분기를 저점으로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주춤거리면서 이미 지난해 8월 국가 신용 등급 강등 조치에서 입증해 주듯 오바마 정부와 Fed의 정책에 대한 믿음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는 이미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고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려 앞으로 4차, 5차 양적 완화를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갈수록 공감대를 형성할가능성이 높다. 대형 금융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잠재 부실을 안고 있는 데다 다른 금융사들의 상황은 더 악화됐다.

이미 나라 살림과 국민들의 빚은 위험수위에 도달했기 때문에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예측 기관들이 직전 전망치의 잉크가 채 굳기도 전에 또 다른 전망치를 내놓기에 바쁘고 최소한 6개월 원칙을 지켰던 Fed의 전망 시점도 4개월로 축소됐다.
끊이지 않는 ‘일본화(Japannization)’ 논쟁, 미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양적 완화로 달러 약세 가속화

미국 경제의 앞날을 보는 시각은 실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낙관론은 회복세가 빠를 것이라는 ‘소프트 패치’와 경제 주체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할 것이라는 ‘라지 패치’로 나뉘고 있다. 비관론도 저점이 두 개 형성될 것이라는 ‘더블 딥’에 이어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한 번 더 깊은 골이 올 것이라는 ‘트리플 딥’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외형상 물가지표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계속된 양적 완화로 잠재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은 점을 감안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나온 지도 비교적 오래됐다. 2분기 성장률 확정치가 나온 이후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슬럼플레이션(slumplation)과 물가·성장률이 동시에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상황이 급격히 돌아가자 Fed는 매월 400억 달러 규모로 주택저당증권(MBS)을 대상으로 한 3차 양적 완화(QE3)를 발표했다. 1차, 2차 양적 완화와 다른 것은 규모나 시한을 정하지 않고 고용 시장이 충분히 개선될 때까지 채권 매입을 지속하기로 해 사실상 무제한 채권 매입에 나선 셈이다.

버냉키 의장이 이 정책을 들고나온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다. 하나는 지금처럼 전통적인 부양책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유동성 공급으로 주가와 주택 가격이 오를 때 ‘부(富)의 효과’로 경기와 고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계속된 위기로 국민의 ‘디레버리징(부채 감소, 저축 증대)’이 끝나지 않은 국면에서는 이 효과는 적게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자국 통화 약세에 따른 수출 진흥 통로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과 신흥국 간의 금리 차가 벌어진 상황에서는 양적 완화 추진 과정에서 풀린 돈은 캐리 자금 형태로 신흥국으로 유입된다. 이때 신흥국 주가와 통화 가치는 동반 상승한다. 물론 미국은 수출 경쟁력이 개선된다. 오바마 정부가 출범 이후 달러 약세 정책을 고집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특정 국가가 경기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경쟁국들에 전가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근린 궁핍화 정책’이다. 달러화와 같은 중심 통화가 평가절하될수록 그 피해는 경제발전 단계상 한 단계 아래 국가에 집중된다.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와 한국이 여기에 해당된다.

미국의 달러 약세 정책에 따라 약화되는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흥국들은 맞대응할 수밖에 없다. 이미 두 차례 양적 완화 추진 과정에서 브라질이 주도가 돼 ‘글로벌 환율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다. 3차 양적 완화 정책 발표 전후로 달러 약세가 재현됨에 따라 브릭스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주목하는 상황이다.

아직까지 ‘일본화’는 우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더딘 미국 경기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최대 관건인 금융과 실물 간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월가에서는 ‘마라도나 효과’가 절실하다고 보고 있다. 현 상황에 적용하면 정책 당국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시장과 정책 수용층이 알아서 행동하면 당면한 현안을 풀 수 있다는 얘기다.



<용어 설명>
경제고통지수 (misery index)는…
미국의 경제학자인 아서 오쿤(Arther Okun)이 고안한 지표로, 실업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해 산출한다. 하지만 이 지수는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체감 경기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종전 경제고통지수에 소득 증가율을 차감해 산출하는 신경제고통지수로 체감 경기를 파악하고 집권당의 경제 성과를 평가한다.

팻 테일(fat-tail) 리스크는…
‘팻 테일 리스크’는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에서 유래돼 꼬리가 살쪄 두터워지면 평균에 집중될 확률이 낮아지고 이를 통해 예측하면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라도나 효과는…
‘마라도나 효과’는 펠레와 함께 월드컵 영웅인 축구 선수 마라도나에 대한 믿음이 강해 수비수가 미리 예측해 행동하면 다른 쪽에 공간이 생겨 정작 골을 넣기가 쉬웠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