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이 그레이삭스 대표

사업을 하는 데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함께할 사람을 찾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함께 꿈꿀 만한 비전과 목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레이삭스도 그랬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시작해 외주 작업도 하고 다양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 이하 앱)을 개발하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도전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였다가 헤어지고 아이템을 수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창업자가 일관되게 사업에 대한 비전을 품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항제철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기계정밀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이승이는 음악을 좋아했다. 연주도 좋아했지만 특히 감상에 취미가 있었다. 첫 학기에 그는 음악 동아리방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 한 것 같다.

동아리에서 그는 나중에 함께 창업하는 방무석을 만난다. 그는 첫 학기만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했지만 제대하고 학교에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시라도 미국에 가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결정이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을 줄 알았을까. 4개월짜리 어학연수를 갔는데 돌아오려고 하니 너무 아쉬웠던 그는 귀국을 1년 늦추기로 했다.
[한국의 스타트업] “다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음악을 좋아한 엔지니어

1년의 시간이 주어지자 다시 주위를 차분히 둘러봤다. 그전까지 그는 다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보스턴에 있었던 그는 현지 유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용기를 얻게 된다.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너도 이곳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너보다 영어를 훨씬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요. 그래서 그 말에 입학 준비를 시작했죠.”

공부한 시간은 고작 6개월.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치르고 서류도 준비할 게 많았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반신반의한 가운데 결단의 시간이 왔다.

“부모님께 전화했어요. 복학하지 않겠다고요. 그리고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할지 확신할 수 없었거든요. 잘못하면 스물넷의 나이에 고졸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죠.”

10여 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줄줄이 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비리그에서도 합격장이 왔다.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코넬대 입학생 중 그는 외국에서 학교에 다닌 경력 없이 바로 입학한 거의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코넬대 전자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가 선택한 직장은 삼성전자. 미국에서 면접을 보고 바로 입사해 금의환향,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2007년까지 그는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무선사업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블랙잭’이었다.

좋은 직장에서 5년 이상 일하면서 그는 ‘인생의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했다. “50이 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회사에서 탄탄대로를 밟아 제일 잘 됐을 때를 생각했을 때 내 모습은 어떨까.”

직장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를 떠올려 봐도 그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힘들겠지만 내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알게 된 2명과 함께 나와 창업했다. 한양대 시절 알게 된 방무석도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2007년 3월 그의 첫 창업 회사 ‘브레인쿼드’를 설립했다. 브레인쿼드는 전자악기를 만드는 업체였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전자 키보드를 만들었다.

1년 반 동안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08년 10월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이승이 대표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제품을 들고 투자자를 물색하고 다녔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그의 첫 창업 작품은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2009년 초 음악을 들으려고 아이팟터치를 구매한 이 대표는 깜짝 놀랐다. “제가 스마트폰을 만들어 봤기 때문에 원리나 기계적인 장치 등에 대해서도 알잖아요. 그런데 사용해 보는 순간 ‘이 정도 퍼포먼스가 어떻게 가능할까’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손으로 키보드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이런 기기를 이용해 터치만 하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업을 수정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앱 개발사로 변신한 것이다.

일이 잘 풀리려니 때마침 더팟이라는 디자인 회사가 새로운 개발팀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회사 김홍균 대표와 만난 이 대표는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회사를 합치기로 했다. 2009년 7월 통합회사 그레이삭스가 설립됐다. 이 대표가 그레이삭스의 대표를 맡고 김홍균 더팟 대표는 그레이삭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기로 했다.

그레이삭스는 한동안 음악 관련 앱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성과도 냈다. 드럼 앱과 스트링 트리오 등은 특히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수익성은 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려면 정말 앱을 10개 이상 만들어야겠더라고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운영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외주 사업을 하면서 회사 운영비는 차질 없이 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회사의 대표작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았다. 다행히 기회가 왔다. 이승이·김홍균 등 회사 주력 멤버들이 밤늦게 회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진을 활용한 SNS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거다!’ 싶은 생각에 이 대표가 작업을 시작, 불과 이틀 만에 뚝딱하고 기본 콘셉트를 만들었다.
[한국의 스타트업] “다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다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미디어를 지향하는 사진 SNS ‘해프닝’

2011년 이 대표는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주최하는 한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장병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대표와 만난 게 계기가 돼 2011년 11월 엔젤 투자를 받게 된다.

사진을 활용한 SNS 이름은 해프닝(Happen.in). 올해 입사한 이 대표의 코넬대 후배 박지현 씨가 이름을 지었다. 언뜻 보기엔 사진을 올려놓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이를 통해 사람들을 사귀어 가는 여느 SNS와 유사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지금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트위터처럼 리트윗을 해서 전파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대상은 얼마든지 제한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실시간으로 찍은 사진만 올려놓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서비스다.

“사진을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브로드캐스트할 수 있는 서비스가 없습니다. 사진을 이용한 미디어가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거죠.”

처음부터 실시간 사진이라는 콘셉트로 간 것은 아니었다. 만들다 보니 현재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게 했는데, 거기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실시간 사진만 올려놓게 하니까 3가지가 달라지더군요.”

그게 뭘까. 우선 올라오는 사진이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댓글이 아니라 사진으로 사람들이 대화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실시간으로 사진을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사진을 공유하면서 전 세계의 뉴스를 공유하는 식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위치를 추가하면 서비스가 한층 더 발전한다. 위치를 정해 놓고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사진을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그 지역의 그동안의 사진을 검색할 수도 있다. 아직 내부적으로 베타 테스트 중인 해프닝은 9월 중 베타 서비스를 시작하고 10월 중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이다.


임원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onkis@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