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을 능가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 기업이 1990년대 이후에는 장기 불황과 신흥국의 도전, 계속되는 엔고, 글로벌 경제 불안 등으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파나소닉·소니·샤프 등 일본을 대표하는 유수의 가전 회사들이 2012년 3월 결산에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 기업은 TV·디스플레이·스마트폰 등 주요 가전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글로벌 1등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최근의 한일 가전 기업 간의 실적 격차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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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신흥국 시장 선점한 한국 기업

이와 같이 한국 기업이 도약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본 기업에 앞서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거대 신흥국 시장을 일찍 공략해 성과를 보인 글로벌 전략의 성공을 들 수 있다. 한국 기업은 국내시장이 협소하다는 한계가 있어 초기부터 해외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글로벌 마인드가 강했다.

인구 1억2000만 명을 넘는 거대한 일본 시장에 안주할 수 있었던 일본 기업과 달리 한국 기업은 처음부터 해외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일본 기업은 거대한 일본 시장에서 개발한 제품을 일본 시장에서 판매해 점차 선진국 시장과 신흥국의 고소득층 시장을 개척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일본 경제의 장기 부진과 함께 리먼브러더스 쇼크 이후 선진국 시장이 위축됨으로써 어려움에 직면했다.

한편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에 도전해 왔던 한국 기업은 국내에서 개발한 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해외 고객의 니즈를 고려해 팔리는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한다는 성향이 강했다. 일본 기업이 세계 최고의 일본 시장을 대상으로 개발한 제품이 당연히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팔릴 것이라는 발상과 비교하면 한국 기업의 발상은 정반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신흥국을 포함해 해외 고객의 니즈에 맞게 제품을 개발하는 글로벌 전략은 리먼브러더스 쇼크 이후 세계시장에서 신흥국의 비중이 높아져 가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위상을 높였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일본 기업도 동남아 등 신흥국 시장에 일찍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신흥국 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리스크가 있지만 성장 잠재력이 있는 신흥국 시장을 선행적으로 개척하는 데에는 미진한 부분도 있었다. 한국 기업은 신규 진출자로서 스스로 신흥국의 리스크를 평가해 일정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잠재력이 있는 신흥 시장을 선점하는 데 도전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기업의 신흥국 시장 공략에 있어서는 글로벌한 제품의 공통화를 통한 양산 효과와 함께 현지 요구에 대응하는 전략의 효과가 동시에 추구됐다. 글로벌한 공통부분과 현지 차별화 부분의 균형점을 찾는데 한국 기업은 능숙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LG전자는 인도네시아 에어컨 시장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특수한 니즈에 세밀하게 대응했다. 현지의 영유아가 뎅기열에 고전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염의 원인인 모기에 대처하기 위해 에어컨에 특수한 초고주파를 발생시키는 기능을 장착해 모기 퇴치에 효과를 거뒀다. LG전자는 또 중동 시장용 TV에 코란을 내장해 현지인의 종교 활동에 대응함으로써 호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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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제품 혁신에 매진

한국 기업은 글로벌 전략을 통해 판매량을 늘리는 한편 연구·개발에 주력하면서 차세대 제품 전략을 적극 전개했다.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한 대만의 홍하이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경영을 성공시켜 규모 면에서 한국 기업을 능가하는 측면도 있지만 차세대 기술을 애플 등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 기업은 글로벌 경영과 기술 경영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기업의 전략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상 강화와 함께 브랜드 파워를 강화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선행 기업이 앞서는 기존 시장에서 후발 기업이 시장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해당 시장에서 브랜드 파워를 구축하는 일이다. 소비자들은 기존 기업의 제품 구매 경험을 통해 선행 기업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후발 기업으로서는 선행 기업과 다른 차별성을 확보해야 하고 경쟁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찾을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은 이러한 측면에서 2000년대 들어 브라운관 TV에서 액정표시장치(LCD) TV로 전환하는 기술 혁신, 제품 혁신에 매진해 경쟁의 지형을 바꾸는 데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관 TV 시대에는 기존 기업인 일본 기업의 브랜드 파워를 능가하기가 어려웠지만 새로운 TV의 혁신 과정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기업이 산업 리더로서의 면모를 갖춰 보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 기업은 브라운관 시대를 주도한 소니가 LCD 등 핵심 부품 사업 진출을 계속 미뤄 기회를 잃었고 파나소닉도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에 집착해 LCD로의 기술 전환 흐름을 타는 데 실기했다. 샤프는 LCD TV 개척자로서 일본 시장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글로벌 전략 측면에서 한계를 보였다.

일본 기업은 이러한 차세대 TV 전략에서의 실기를 만회하기 위해 200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한국 기업에 재역전하기 위해 주력했지만 이것이 현재 대규모 적자를 초래해 샤프의 경우 재무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기업이 LCD에서 발광다이오드(LED) TV, 3D TV로 제품 고도화에 계속 매진하면서 신흥국과 선진국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해 일본 기업의 재역전 시도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은 이러한 차세대 제품 전략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디스플레이와 함께 소재 분야를 강화하는 한편 일본 소재 기업을 포함한 수많은 협력 기업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새로운 제품 및 사업을 신속하게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높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 능력이 현재 차세대 제품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로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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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의사 결정과 위기의식

한국 기업의 도약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계기로 실시된 구조조정,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체화된 위기의식이 밑거름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을 슬림화하고 조직의 관료주의적 폐해를 억제함으로써 기존의 스피드 경영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제품 개발, 해외시장 개척에서 끈기 있는 노력을 유도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 기업 조직 내에서 영향력이 큰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버블 붕괴기에 40대 중반의 핵심적 근로자로 있으면서 신속한 버블 처리나 새로운 혁신을 주도하지 못하고 점차 보수화된 측면도 있었다.

큰 도전보다 자신의 정년퇴직 시점까지 회사가 큰 혼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심리가 일본 기업의 각 조직 계층에서 보수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측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국 기업 등 신흥국 기업의 도전을 애써 과소평가해 변화를 억제하려는 행태가 일본 기업 조직 내부에서 작용했다.

이상과 같은 일본 기업의 실패 요인과 한국 기업의 성공 요인은 앞으로 우리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성장하기 위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 기업으로서는 성공에 취해 자만하거나 보수화될 것이 아니라 위기의식과 도전 정신을 기반으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지속적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