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악몽이 떠돈다. 10여 년 전 중국은 물론 주변국을 공포로 몰았던 전염병이 다시 도졌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7월 21일 내린 폭우는 2003년 봄 베이징을 강타한 사스로 드러난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를 재확인해 준다. 당국은 베이징에서 1951년 기상 관측 이후 최대 강우량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베이징시 평균 강우량 164mm에 77명이 숨진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팡산구에 하루 만에 460mm가 쏟아지는 등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현지 언론들이 전한 폭우 당일 상황은 쓰나미를 연상케 한다.

중국 시민들을 흥분시킨 것은 사망자에 대한 부실 통계 때문이다. 7월 22일 37명으로 발표된 사망자 숫자에 수백 명이 사망했을 것이라며 은폐 의혹이 쏟아지자 베이징시는 며칠 뒤 실종자를 포함해 77명이라고 발표했다. 사스 사태 때 사망자 수를 축소하다가 전염병 확산에 일조한 중국 당국의 통계 조작 관행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언론 통제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 주간지 경제관찰보가 정간 위기에 처했다고 홍콩 언론들이 보도한 게 대표적이다. 베이징 문화국 관리들이 최근 경제관찰보 베이징 본부 사무실 밖에 있는 현판을 떼어냈다는 것이다. 베이징시는 앞서 8월 4일 경제관찰보가 등록지 밖에서의 보도를 금지하는 규정을 어겼다며 신문사에 최신판을 자진 회수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제관찰보는 지난 8월 4일 발행한 6일자에서 중국 당국이 발표한 실종자 명단에 없는 실종자를 찾아 보도했다. 경제관찰보는 폭우 발생 이후 발간한 7월 30일자에서도 1면을 비롯해 4개 면을 털어 “폭우 중 베이징은 도시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를 못했다”며 “더 이상 도시가 아니다”고 보도하는 등 강도 높은 비판 논조를 유지한 게 괘씸죄에 걸렸을 것이라는 설이 나온다.

행정 책임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것도 사스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사스 사태로 당시 베이징 시장과 위생부 부장(장관)이 통계 축소 의혹 등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을 때만 해도 중국에선 드디어 장관급 관리들에게까지 ‘행정 책임주의’가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부패로 물러난 고위급 인사는 적지 않았지만 일 처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고위직이 처음으로 물러났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알려진 당시 베이징 시장 멍쉐눙은 1년도 안 돼 다른 관직에 복귀하면서 정치 쇼였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이번에도 베이징 시장이 물러났다고 발표됐지만 7월 초 베이징시 당서기로 선임된 궈진룽이 원래 맡았던 시장직을 일시 겸임하고 있는 터에 내놓은 ‘쇼’라는 비판이 나왔다.
[중국] 중국 정부의 통계 조작 관행? "폭우 사망자 수 축소…비판언론 정간 위기"
자연피해 최소화 시스템 갖춰야

재난 방지보다 사후 처리에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스 때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사후 처리 과정에서 희생된 공직자 등을 미화하는 것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자연재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연평균 강수량이 600~800mm로 건조해 배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도로에 물이 차는 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나무가 늘어나는 등 겉보기엔 환경이 크게 개선됐지만 배수 시스템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사스 사태 때 위생 불량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쓰레기 분리수거가 추진됐다가 무산될 만큼 보이지 않은 곳의 인프라 구축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가 입에 달고 다니는 과학적 발전관과는 거리가 멀다. 성장 제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베이징 도심의 홍수에 대비해 배수로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지정된 곳에 부동산 개발이 이뤄지고 1000여 개의 석재 공장 난립으로 인근 하천으로 흘러든 쓰레기가 쌓이면서 하천의 폭이 크게 좁아져 폭우로 인한 인명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베이징=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