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난 6월 말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인터넷 오픈 마켓에서의 할인 판매를 통제한 필립스전자에 과징금 15억 원을 부과했다. 이와 관련, 공정위가 내놓은 보도 자료에서 흥미로운 통계 자료가 눈에 띄었다. 바로 필립스의 제품별 국내 시장점유율이다.

공정위는 필립스가 전기면도기(61.5%), 음파 전동칫솔(57.5%), 전기다리미(44.2%), 커피메이커(31.3%), 음식 제조 가전(28.4%) 등 소형 가전 대부분 제품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1위(2011년 기준)에 올라 있다고 공개했다. 소형 가전은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을 제외한 주방 기기, 이·미용기기, 청소기, 냉·난방기를 통칭한다. 전기밥솥·청소기·선풍기·헤어드라이어·면도기·커피메이커 등으로 대체로 20만 원대 미만이 대다수다. 공정위 발표대로라면 필립스가 국내 소형 가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비즈니스 포커스]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프로모션 최강자…맞춤 전략 구사"
필립스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가전 업체다. 지난해 매출액은 약 226억 유로(31조6000억 원)다. 필립스전자는 로열 필립스 일렉트로닉스(Royal Philips Electronics)의 자회사로 국내에 소형 가전, 의료기기, 조명기기 등을 수입·판매하고 있다. 실제로 필립스는 한국 시장에서 매년 성장하고 있다. 2011년 4544억 원의 매출과 138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소형 가전 부문은 큰 폭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005년 791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지난해 1642억 원으로 두 배 늘어났다.

국내 소형 가전 시장은 유럽계 가전사들의 격전장이다. 프랑스에 본사가 있는 그룹 세브(Group SEB) 계열의 로벤타와 테팔, 스웨덴 계열의 일렉트로룩스, 지난해 ‘날개 없는 선풍기’를 국내에 선보인 영국계 다이슨, 독일계 지멘스 등이 필립스와 경쟁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필립스가 선전하고 있는 비결은 뭘까.
[비즈니스 포커스]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프로모션 최강자…맞춤 전략 구사"
현지화 마케팅에 성공한 것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품목이 주방 가전으로, 주부들의 피드백을 제품 개발에 적극 반영한 것이 히트 상품 탄생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 내놓은 이녹스 블렌더는 한국 주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스테인리스 스틸의 재질을 사용했다. 색이 변하거나 냄새가 밸 걱정이 없는 데다 용량도 2리터로 크게 만들어 많은 양의 재료를 한꺼번에 분쇄할 수 있어 주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올 초 선보인 한국형 그릴도 국물 요리가 많은 한식 조리법의 특성상 일반 그릴보다 깊이가 있는 팬이 실용적일 것이라는 소비자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제품이다. 토스터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 내부에 먼지가 쌓인다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뚜껑 달린 토스터’와 잔여물이 남는 음식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씨나 껍질 등 잔여물을 거르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만들어진 블렌더용 거름망 액세서리도 모두 한국 시장에 맞춘 제품이다.

필립스는 올 초 생활 및 주방 가전 사업 본부를 네덜란드에서 아예 중국으로 이전했다. 필립스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는 제품 선택 기준이 까다롭고 눈높이가 높은 데다 트렌드에 민감하며 정보 공유가 빠르고 소통에도 적극적”이라며 “한국을 포함한 주요 시장 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비즈니스 포커스]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프로모션 최강자…맞춤 전략 구사"
검증된 제품력도 필립스 돌풍의 비결이다. 예컨대 면도기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의 최강자다. 면도기 날이 피부에 직접 닿지 않아 피부를 보호할 수 있는 면도기나 기존의 건식 면도는 물론 셰이빙 폼이나 젤을 사용하는 습식 면도기까지 선보였다. 제품군이 다양한 것도 필립스만의 장점이다.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이 사용해 화제가 된 ‘센소터치 3D’와 같은 최고급 면도기, 샤워하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100% 방수 면도기, 수염 기르기를 원하는 남성을 위한 그루밍 제품 라인, USB 케이블로 충전이 가능한 여행용 면도기 등이 있다.

새로운 콘셉트의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필립스의 제품력을 돋보이게 한다. 지난해 선보인 신개념 튀김기 필립스 에어프라이어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에어프라이어는 기름 없이 튀김 요리를 할 수 있는데, 고속 공기 순환 기술을 적용한 이 제품은 최대 섭씨 영상 200도의 뜨거운 공기를 위아래로 강하게 순환시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튀김 요리를 만들어 준다. 이 때문에 기름을 이용한 튀김 요리에 비해 지방 함량을 80% 줄일 수 있는 데다 요리 시간도 단축해 준다. TV 홈쇼핑 방송에서 전량 매진을 기록하는 등 한국 주부들 사이에서 갖고 싶은 주방 가전으로 손꼽힌다.

브랜드 인지도와 고객 서비스가 경쟁사보다 뛰어나다는 점도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리서치가 2009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필립스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인지도는 99%에 달했다. 브랜드 인지도는 많은 소비자들이 해당 브랜드를 이용하는 요인 중 하나다. 요리동호회 싸이쿡 운영자인 이희숙 씨는 “필립스는 제품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인지도가 높은 유럽 브랜드라는 점이 주부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포커스]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프로모션 최강자…맞춤 전략 구사"
애프터서비스 소비자 호평

사후 서비스도 비교적 탄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은상 하이마트 생활가전 바이어는 “우리나라 소비자는 애프터서비스를 무척 중시한다”며 “필립스는 무상 보증 서비스 기간이 2년으로 외국 브랜드 중 가장 길며 수입사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서비스망이 제대로 구축돼 있다”고 말했다.

필립스의 성공 요인으로 ‘한국적인 마케팅’을 꼽는 이도 있다. 조용구 이마트 소형가전 바이어는 “필립스는 매달 프로모션을 하고 있을 정도로 프로모션의 최강자”라며 “한국 소비자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외국 브랜드들이 일반적으로 글로벌 본사의 마케팅 전략을 고수하는 반면 필립스는 한국 시장에 맞춤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희영 필립스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부문 마케팅 이사는 “현지 시장에 맞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상황에 맞는 판매 전략과 함께 프로모션·광고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통일성 있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적 가전 업체이자 국내 대형 가전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소형 가전에 공을 들이지 않고 있는 것도 필립스 선전의 배경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냉장고·세탁기·TV 등 대형 가전에 주력하면서 소형 가전 시장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비즈니스 포커스]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프로모션 최강자…맞춤 전략 구사"
한편 필립스가 국내 소형 가전 시장을 휩쓸고 있지만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역할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필립스의 지난해 기부금은 865만 원에 불과하다. 반면 배당금은 64억 원으로 배당률이 101.21%에 달한다. 2010년에도 113억 원을 배당해 104%의 배당률을 기록했다. 인터넷 할인 판매를 통제해 공정위로부터 과징금을 부과 받은 것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필립스의 선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업계에 따르면 일렉트로룩스·지멘스·밀레·다이슨 등이 소형 가전의 품목 수를 늘리며 보다 적극적으로 영업 확대를 꾀하고 있는 데다 한경희생활과학·웅진코웨이 등 국내 중견 가전사들도 소형 가전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점차 격화되고 있는 국내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