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필립스가 전기면도기(61.5%), 음파 전동칫솔(57.5%), 전기다리미(44.2%), 커피메이커(31.3%), 음식 제조 가전(28.4%) 등 소형 가전 대부분 제품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1위(2011년 기준)에 올라 있다고 공개했다. 소형 가전은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을 제외한 주방 기기, 이·미용기기, 청소기, 냉·난방기를 통칭한다. 전기밥솥·청소기·선풍기·헤어드라이어·면도기·커피메이커 등으로 대체로 20만 원대 미만이 대다수다. 공정위 발표대로라면 필립스가 국내 소형 가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국내 소형 가전 시장은 유럽계 가전사들의 격전장이다. 프랑스에 본사가 있는 그룹 세브(Group SEB) 계열의 로벤타와 테팔, 스웨덴 계열의 일렉트로룩스, 지난해 ‘날개 없는 선풍기’를 국내에 선보인 영국계 다이슨, 독일계 지멘스 등이 필립스와 경쟁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필립스가 선전하고 있는 비결은 뭘까.
올 초 선보인 한국형 그릴도 국물 요리가 많은 한식 조리법의 특성상 일반 그릴보다 깊이가 있는 팬이 실용적일 것이라는 소비자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제품이다. 토스터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 내부에 먼지가 쌓인다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뚜껑 달린 토스터’와 잔여물이 남는 음식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씨나 껍질 등 잔여물을 거르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만들어진 블렌더용 거름망 액세서리도 모두 한국 시장에 맞춘 제품이다.
필립스는 올 초 생활 및 주방 가전 사업 본부를 네덜란드에서 아예 중국으로 이전했다. 필립스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는 제품 선택 기준이 까다롭고 눈높이가 높은 데다 트렌드에 민감하며 정보 공유가 빠르고 소통에도 적극적”이라며 “한국을 포함한 주요 시장 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콘셉트의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필립스의 제품력을 돋보이게 한다. 지난해 선보인 신개념 튀김기 필립스 에어프라이어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에어프라이어는 기름 없이 튀김 요리를 할 수 있는데, 고속 공기 순환 기술을 적용한 이 제품은 최대 섭씨 영상 200도의 뜨거운 공기를 위아래로 강하게 순환시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튀김 요리를 만들어 준다. 이 때문에 기름을 이용한 튀김 요리에 비해 지방 함량을 80% 줄일 수 있는 데다 요리 시간도 단축해 준다. TV 홈쇼핑 방송에서 전량 매진을 기록하는 등 한국 주부들 사이에서 갖고 싶은 주방 가전으로 손꼽힌다.
브랜드 인지도와 고객 서비스가 경쟁사보다 뛰어나다는 점도 필립스가 잘나가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리서치가 2009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필립스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인지도는 99%에 달했다. 브랜드 인지도는 많은 소비자들이 해당 브랜드를 이용하는 요인 중 하나다. 요리동호회 싸이쿡 운영자인 이희숙 씨는 “필립스는 제품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인지도가 높은 유럽 브랜드라는 점이 주부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사후 서비스도 비교적 탄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은상 하이마트 생활가전 바이어는 “우리나라 소비자는 애프터서비스를 무척 중시한다”며 “필립스는 무상 보증 서비스 기간이 2년으로 외국 브랜드 중 가장 길며 수입사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서비스망이 제대로 구축돼 있다”고 말했다.
필립스의 성공 요인으로 ‘한국적인 마케팅’을 꼽는 이도 있다. 조용구 이마트 소형가전 바이어는 “필립스는 매달 프로모션을 하고 있을 정도로 프로모션의 최강자”라며 “한국 소비자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외국 브랜드들이 일반적으로 글로벌 본사의 마케팅 전략을 고수하는 반면 필립스는 한국 시장에 맞춤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희영 필립스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부문 마케팅 이사는 “현지 시장에 맞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상황에 맞는 판매 전략과 함께 프로모션·광고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통일성 있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적 가전 업체이자 국내 대형 가전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소형 가전에 공을 들이지 않고 있는 것도 필립스 선전의 배경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냉장고·세탁기·TV 등 대형 가전에 주력하면서 소형 가전 시장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필립스의 선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업계에 따르면 일렉트로룩스·지멘스·밀레·다이슨 등이 소형 가전의 품목 수를 늘리며 보다 적극적으로 영업 확대를 꾀하고 있는 데다 한경희생활과학·웅진코웨이 등 국내 중견 가전사들도 소형 가전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점차 격화되고 있는 국내 소형 가전 시장에서 필립스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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