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소위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1995년에는 100% 수능 성적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소위 성적 위주의 획일적 선발 방식만 존재하던 시기였는데, 아버지는 그 당시 나를 입학사정관제에 걸맞은 방식으로 키웠다. 소위 입학사정관제의 얼리어답터라고 부를 만하다.
딸 셋의 막내였던 내게 아버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공부해라”, “왜 공부를 못하니”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시험공부를 한다고 밤을 새우던 내게 “왜 밤을 새우니,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란다”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또한 독서를 즐겼던 내 손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딸들의 필독서였던 ‘신데렐라’, ‘백설공주’ 대신 추리소설이 쥐어져 있었다. 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지일관 추리소설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게 이웃들은 여자애가 왜 추리소설만 읽느냐며 혀를 끌끌 찰 때 아버지는 어린이와 중·고교생을 위한 추리소설을 열심히 사주시곤 했다.
지금 학부모님들은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교와 학원에 열심히 데려다 주는 운전사 역할을 하지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께서는 대학생이자 성인이 된 큰언니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아르헨티나로 사업을 하러 떠나셨다. 각각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세 딸들은 1년 반 동안 가정경제를 매우 씩씩하게 꾸려나갔다.
![[아! 나의 아버지] 입학사정관제의 얼리어답터](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02303.1.jpg)
![[아! 나의 아버지] 입학사정관제의 얼리어답터](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02304.1.jpg)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독립적인 삶을 사는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의 얘기를 해주시며 대학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주신 후 “성인이 되었으니 스스로 용돈을 벌어라”는 말씀과 함께 금전 지원을 해주지 않으셨다. 결국 입학금과 첫 등록금은 내 인생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마지막 돈이었고 대학생 시절 과외에서부터 래프팅 캠프 진행, 레크리에이션 강사, 국제 행사 진행,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 등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 와중에 호텔에서 행사를 지원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금융권에 종사하는 애널리스트와 금융 관계자들을 보면서 기필코 졸업하면 내가 저 자리에 있겠다고 마음먹었던 계기가 애널리스트를 하게 된 근간이 됐다.
계면쩍지만 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상을 수차례 받았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해외 유학파도 아니다. 이런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의 자기 주도형 학습에 근거한 교육철학 덕분이었지 않을까.
김미연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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