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해양 엑스포가 한창 열리고 있는 여수시 광무동에 있는 큰 규모의 종합병원 원장이셨다.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여수시 의사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다. 7남매 가운데 넷째인 아버지는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의대·약대) 공부를 해야 했다.

본래 아버지는 바다의 기운을 받고 자라서였는지 큰 배를 이끌고 전 세계를 넘나드는 선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뜻에 의해 꿈을 접어야 했다. 사촌들 또한 당연한 것처럼 대부분 의대로 진학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의대로 가기엔 수능 점수가 부족했다.

의사 집안 문화 속에서 자란 내게 잠재된 재주를 이끌어 내도록 용기를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종종 내게 “의사로서 일하는 것도 보람되지만 세계로 나가려던 내 꿈은 병원 건물에 갇혀 버렸다. 넌 나가서 더 큰 세상을 맞이하거라”며 꿈을 심어주셨다.

서울로 대학 진학한 후 나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나를 잃어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무한 자유를 느끼던 1학년 때 너무나 좋아하던 음악에 빠져 인터넷 음반 장사에 손을 댔다. 당시엔 인터넷 쇼핑몰이 많지 않던 시절인지라 내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가족 몰래 하던 사업이 신문에 소개되는 바람에 그 기사를 본 아버지로부터 “당장 회사의 대차대조표를 가지고 내려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업이 성장하고 있던 터라 자신 있게 자료를 준비하고 내려간 나는 아버지에게 현재의 상황과 미래를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아버지는 흡족하신 듯한 미소를 지으시고 “꾸준히 성장시켜 보라”며 비로소 식어버린 식사를 드시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일궈낸 결과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아! 나의 아버지] “아들아! 더 큰 세상이 있단다”
얼마 후 새로운 의료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공개 입찰을 진행하고 있던 아버지는 일본 도시바메디컬 사장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내가 동행할 것을 원하셨다. 2박 3일간 의료 장비 연구소를 비롯한 제작 현장 등 곳곳을 돌아보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도시바 사업팀 사장과 같은 호텔방을 쓰게 하셨다. 내가 엘리트급으로 다듬어진 영업력을 배우기를 희망하셨던 것이다. 보이지 않게 배려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어느 정도 내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돼 갈 무렵인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심상치 않으니 당장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 건강한 체력과 늘 밝은 성격의 아버지를 믿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집으로 내려갔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세는 폐암 말기.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떠나는 순간 울고 있는 나를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울지 마라, 아들아. 내 죽음이 네겐 큰 고통이겠지만 후에 더 큰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어린 새가 날기 위해선 둥지에서 어미 새가 발로 밀어 땅으로 떨어뜨려야 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고 포식자에게도 잡히지 않게 된다. 지금 당장은 마음이 아파도 너는 널리 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가르침을 주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미국에서 더 큰 사업을 일구게 됐다. 쉽지 않은 과정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배운다.


정세주 눔(NOO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