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기 상무,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인사담당 총괄임원

그해 겨울바람은 유독 매섭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양어깨에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겨울에 최전방 부대로 소대장 보임을 받고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한 장의 메모를 건네주셨다.

아버지의 글씨는 누가 보아도 명필이다. 메모지에는 일곱 가지 ‘근무 요령’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상황 판단에 의한 업무 수행, 일일 업무 점검, 상관의 관심 사항 파악/실행 중점, 대인 관계 우호적인 언동, 부하의 신상 파악, 스스로 모범적이고 겸손한 태도, 관행 의문점은 동료 장교 상사에게 수시로 문의하고 환경에 적응할 것’ 등등. 아버지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또박또박 그 의미를 내게 설명해 주셨다.

처음에는 그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는데, 국내 대기업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다국적기업에서 20년간의 나름 경쟁력 있는 커리어를 쌓은 이 시점에서 아버지의 메모를 읽어보면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원칙과 철학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무릎을 치게 된다. 단 한 장의 짧은 메모였지만 아버지의 경험과 철학이 압축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양한 커리어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선수’들을 보았지만 이 일곱 가지를 일상 속에서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이 만나지 못했다. 더욱이 기업에서 인사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요즘 들어 오히려 더 아버지 메모에 ‘숨어있는’ 가치를 새삼 느끼곤 한다.
[아!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메모는 내 인생 ‘내비게이터’
잊을 만하면 이따금씩 그 글을 꺼내보면서 이 쉽지 않은 조직 생활 속에서 내 자신이 중심을 잘 잡고 걸어가고 있는지 체크하곤 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건만 아직도 그 ‘좋은 습관’의 노예로 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걸어 왔던 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셨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우친다. 어떻게 그 불확실했던 혼돈의 시대를 당신께서는 힘들다는 넋두리 한 번 없이 그리도 꿋꿋이 버텨 오셨을까 생각하면서 이내 존경심마저 생기게 된다.

지금의 이 세상은 아버지의 청장년 시절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다. 그런데 가치와 원칙은 상실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 직장을 어떻게 다닐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잊은 지 오래다. 철학도 없고 원칙도 없다면 우리네 삶이, 우리의 커리어가 얼마나 힘들어질까.

비록 그 메모지는 누렇게 빛깔이 바랬지만 그 속에 있는 아버지 특유의 힘 있는 필체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 한 글자 한 글자가 ‘툭툭’ 튀어나올 듯하고 그 지혜의 메시지는 여전히 내 심장 속에 ‘팍팍’ 꽂히고 있다.

이제 내 노트도 남겨야겠다. 내 아들은, 내 손자는, 내 며느리는 세월이 흐른 뒤 언젠가 이 ‘상심의 바다(Sea of heartbreak)’같은 세상 속에서 인생을 조금 알 무렵이 되었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인생과 철학을 조금씩은 이해하게 되겠지….

오늘 밤은 겸손히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다. ‘그 지혜로운 아버지가 조금만 더 오래 건강하게 내 곁에 계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