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머니가 아프다. 집에 좀 들러라.” 한 달 전 토요일 이른 아침,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차로 10여 분 거리인 부모님 집에 황급히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예의 느릿한 말투로 어머니의 상태를 태연하게 설명하셨다. 다행히 어머니는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한나절쯤 이런저런 검사 끝에 퇴원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몸이 좋지 않다면 바로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아버지의 느긋한 대응이 마뜩잖아 한마디 했더니 “너도 힘든데 늦잠이라도 자게 해야지…”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남한테 폐가 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고 ‘그냥 내가 좀 힘들면 되지’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40여 년을 초등학생들을 가르치셨다. 같은 동료 교사인 어머니를 만나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뒀다.

딸 부잣집에 어렵사리 얻은 여섯 번째의 아들이었지만 흔히 내 또래의 아버지들처럼 아들에게 다정하거나 애정 표현을 하는 그런 아버지는 아니었다. 평소 아버지는 내게만 무엇을 하지 말라거나 혹은 하라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아버지가 나로서는 불만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초상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또래 사촌이 나를 찾아왔다. 사촌은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않아 다리가 불편했다. 그런 사촌을 같은 반 몇 명이 계속 괴롭혔고, 그날도 폭력에 시달리다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나는 사촌을 괴롭힌 학생들을 불러내 이야기하다가 싸우게 됐다. 그리고 학교 인근 공터에서의 싸움은 동네 주민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달이 났다.

나는 경찰서에 끌려갔고 아버지와 큰아버지 모두 경찰서의 부름을 받고 오셨다. 아버지는 평소 사촌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선처를 바란다며 읍소하셨다. 아버지 덕에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아버지의 발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던 아버지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하셨다. “내가 너라도 그랬을 것이다. 네 양심에 비춰 한 행동이면 문제없다. 오히려 불의를 보고 모른 척하는 게 더 나쁘다.”

그때 어렴풋이 아버지가 나한테 무관심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소소한 잘못을 지적해 고쳐주기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 내 스스로가 알아가기를 원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처음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대학 시절 썼던 습작 노트를 꺼내 주시며 그러라고 하셨다. 졸업 후 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도 당신도 공무원이면서 ‘공무원은 이래야 한다’는 그 흔한 훈계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홀연 연구소를 그만두고 뉴욕에서 보석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냥 많이 고민했을 테니 그러라고 하셨다.

최근에서야 아버지에게 그간 내게 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셨는지, 그래서 때론 섭섭했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네 할아버지는 내가 법대를 가길 바라셨지만 난 문학을 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크게 실망하셨고 당신 살아생전 내내 죄송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생각대로 했었다면 내가 행복했을까. 나는 선생님으로서 참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너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나도 이젠 두 아들의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와는 사뭇 다르게 ‘이건 해라, 이건 하지 마라’며 잔소리를 쏠쏠히 해대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냥 뒷짐을 지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깊은 그늘을 내려 휴식을 주는, 그런 나무 같은 아버지가 돼야 할 텐데 말이다.



이승우 (주)쥬얼밸리(메트로시티쥬얼리) 총괄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