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서울에서 화장품 제조업을 하셨다. 종손이신 아버지는 종갓집을 지켜야 한다는 할아버지 권유에 따라 잘되던 사업을 접고 광복 후 고향에 내려와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약방을 개업하셨다. 1979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40여 년간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약방을 운영하셨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다소 넉넉한 지주였다. 그런 넉넉한 집에 잘난 정치인 사위를 맞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매형은 자유당·공화당 시절을 거치면서 8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2번 당선한 골수 야당 후보였다. 그 당시 야당 생활은 독립운동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나의 사춘기는 질곡(桎梏)의 유신 시대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우리 집은 외동아들의 등록금 하나 제대로 내 주지 못할 정도로 몰락돼 갔다. 한번은 등록금에 하숙비까지 몇 달 밀려 할 수 없이 집에 갔는데 어느 노인이 아버지에게 구걸하다시피 돈을 얻어 황급히 나가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큰 매형 선거 참모의 부친인데 아들이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마지막으로 개소주를 먹고 싶어 한다며 돈을 얻으러 온 것이다. 거절 못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학비를 받으러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날 매상을 톡톡 털어 그 노인의 빈손에 채워 보낸 것이다. 자식에게는 늘 엄격하고 남에게는 항상 베푸시기만 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 나의 아버지] ‘좋은 친구’ 소중함 일깨워 주시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17563.1.jpg)
나는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어 왔고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20년간 변화무쌍한 사업 세계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풍요로워지기도 했고 때론 악연을 만나 오랫동안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어김없이 아버지가 계셨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柔能勝剛)’라는 인간관계의 가르침을 주시고 그 선한 삶을 살고가신 아버지, 당신을 닮아 행복합니다.
이승완 서울프로폴리스 대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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