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한 한국 사람.’ 한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다. 비단 이동통신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스피드 지향성은 2000년 전후 시작된 정보기술(IT) 혁명의 원동력이 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스피드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안목은 제조업의 질적 성장까지 가능하게 했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을 테스트마켓으로 삼겠다고 들어오는 형국이다. 심지어 1억 원이 넘는 최고급 수입차는 독일·미국·중국 등에 이어 한국이 세계 4~5위 시장을 차지할 정도다.

이런 한국에서 사이버 쇼핑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김윤태 온라인쇼핑협회 사무국장은 “한국 온라인 쇼핑 발전은 ▷공급자 ▷수요자 ▷인프라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시장 신뢰도를 갖춘 신규 업체의 성장과 대기업의 진입에 따른 경쟁, 얼리어답터 성향을 지니면서 보다 싼 상품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액티브한 소비자들의 행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1인당 4.8장의 카드 보급률과 발달한 택배 시스템이 그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넷경매업체인 옥션은  동대문 평화시장등 재래시장 상인들이 사이버상에서 제2의 매장을 만들어 불황을 타개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평화시장상인들이 옥션도우미들과  매장설치방법을 의논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
인터넷경매업체인 옥션은 동대문 평화시장등 재래시장 상인들이 사이버상에서 제2의 매장을 만들어 불황을 타개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평화시장상인들이 옥션도우미들과 매장설치방법을 의논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
IMF·IT 버블·카드 사태가 키웠다

인프라 측면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부분이다. 최근 미국 출장을 다녀온 직장인 김모 씨는 “호텔 인터넷 사용료가 24시간에 2만 원가량이어서 스타벅스의 와이파이를 이용했는데, 속도가 초당 20KB대였다. 텍스트 기반의 e메일이나 겨우 전송할 수 있는 정도지 사진을 올리거나 다운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전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어느 커피점이나 이동통신(3G망)보다 더 빠른 와이파이를 제공하고 있다.

통신망의 속도는 웹사이트의 수준을 규정한다. 한국에선 그 어떤 쇼핑몰 사이트의 홈페이지든 다양한 상품, 수많은 사진, 화려한 색감으로 정신을 쏙 빼 놓는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쇼핑몰은 텍스트 기반의 단순한 포맷이 많다. 한국 쇼핑몰은 제품을 소개할 때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과 설명들로 가득 차 있지만 미국 쇼핑몰은 달랑 작은 사진 하나에 설명도 한두 줄로 끝이다.

사실 통신판매는 미국이 원조다. 물건을 구매하려면 자동차를 타고 20~30분 나가야 겨우 가게가 나오는 지리적 특성상 카탈로그를 이용한 통신판매가 100년 전부터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쇼핑이 규모에 비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인터넷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다.

높은 카드 보급률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버 쇼핑의 보급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경제활동인구 1인당 4.8장(2011년 상반기)의 신용카드를 보유할 정도다. 계좌 입금과 달리 신용카드는 실제 구매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에 판매 사기를 방지할 수 있다. 구매 후 취소도 간편하다. 2002년 ‘카드 사태’로 부작용을 빚었지만 그 직전까지의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은 사이버 쇼핑의 보급률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용카드의 과잉 발급과 카드 사태로 이어진 시기는 한국의 IT 버블이 꺼지는 시기와도 비슷하다. 둘 다 전자상거래의 발달을 촉진했던 인프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급자 측면에서는 거래 사이트들이 다양한 마케팅과 홍보 기법을 발달시키면서 소비자들의 ‘손길’을 사로잡았다. 1998년 오픈한 옥션은 원래 오픈마켓이 아니었다. 가락시장의 전자 경매 시스템을 구축한 개발자들이 창업한 ‘(주)인터넷 경매’가 전신으로 미국 이베이(ebay)가 인수하기 전까지 옥션의 주 거래는 공동 경매였다. 옥션에서 물품을 파는 판매자는 옥션의 머천다이저(MD)가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2001년 이베이에 인수된 옥션은 누구나 판매자가 될 수 있는 오픈마켓으로 변신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퇴직한 실직자들이 점포 비용 없이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오픈마켓으로 몰리면서 오픈마켓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용산의 전자상가 상인들과 동대문의 의류 상인들까지 오픈마켓에 가세하면서 이때부터 사이버 쇼핑은 연 10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했다.
[전자상거래 1000조 시대] 한국의 사이버 쇼핑 16년의 변천사, 백화점 이미 ‘추월’, 마트에 ‘도전장’
사이버 쇼핑이 백화점 고급화 불렀다

사이버 쇼핑은 오프라인 유통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97년 인터파크, 1998년 옥션, 2000년 G마켓 등이 차례로 설립된 이후 사이버 쇼핑이 성장하면서 저가 제품은 사이버 쇼핑, 고가 제품은 백화점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이전 백화점은 고가 제품도 팔았지만 여유 공간을 활용한 매대나 외부 공간을 이용해 저가품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저가 제품 시장이 사이버 쇼핑으로 옮겨가자 백화점은 명품 매장을 들여오는 등 고급화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2010년 연간 거래액 기준으로 사이버 쇼핑은 백화점 매출을 앞지르며 유통 업태 중 대형 마트에 이은 2위로 올라섰다. 사이버 쇼핑은 백화점에서 파는 모든 상품 카테고리를 취급하면서 백화점의 경쟁 상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젠 저가 제품뿐만 아니라 중·고가 상품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는 것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백화점은 특정 콘셉트에 특화하거나 명품 판매에 더욱 매진하는 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쇼핑은 개방형과 관리형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 예로, 옥션과 G마켓을 들 수 있다. 일본에 직접 진출했다가 쓴맛을 본 이베이는 한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대신 옥션을 인수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나 미국의 방식처럼 별도의 관리 없이 단순 중개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경쟁사인 G마켓은 당일 이벤트를 기획하면 당일 사이트에 올라갈 정도로 철저한 관리형이었다. 3년 만에 G마켓이 옥션을 제치고 업계 1위가 되자 이베이는 2009년 G마켓까지 인수했다. 경쟁사이던 G마켓과 옥션이 형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어 2009년 SK그룹이 11번가로 오픈마켓에 진출하면서 오픈마켓은 3개의 선두 그룹 체제로 재편됐다. 11번가는 경쟁사보다 더욱 적극적인 마케팅과 홍보, 고객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빠르게 성장해 업계 2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

11번가 측은 “2008년 개인 정보 유출로 타격을 입은 옥션을 제치고 우리가 업계 2위”라고 주장하고 있고 옥션은 “2008년 당시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빠르게 회복했다. 정확한 거래액을 집계하는 공인 기관이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옥션이 더 앞선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근소한 차이이므로 2, 3위 구분은 큰 의미는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한편 2011년 12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사이버 쇼핑은 질적인 도약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에서는 중개 사이트들이 소비자들의 피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간 오픈 마켓은 판매자와 구매자를 단순히 중개만 한다는 이유로 책임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

“우리는 시장을 제공한 것일 뿐 매매는 시장 상인과 고객이 한 것이므로 책임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개정안에 따라 중개 사이트가 먼저 고객에게 피해를 보상하고 판매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바뀔 예정이다. 2000년대 중반 연 100% 이상의 성장세를 구가하던 사이버 쇼핑의 성장률은 최근 연 20%대로 주춤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통 업계보다 성장률이 높다.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에 대해 11번가와 옥션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11번가는 “우리는 개정안이 나오기 전부터 짝퉁·사기·불량품에 대해 보상해 오고 있었던 만큼 법 개정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다른 업체는 다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반면 옥션 측은 “고객 대응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축적된 노하우가 있어야 가능한데, 이것을 타 업체들이 쉽게 따라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네이버가 직접 오픈 마켓에 진출하기로 알려지면서 업계 판도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네이버는 현재 가격 비교 사이트인 ‘지식쇼핑’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 수익원은 제품 검색 결과에 따른 검색 광고와 연결된 인터넷 쇼핑몰의 판매 수수료다. 오픈마켓 업계는 공통적으로 네이버가 판매 수수료를 노리기보다 규모 있는 사업체 위주로 선별해 검색 광고를 받는 수익 모델을 추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직접 진출은 소비자 피해 보상 등 소비자들의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 노하우를 짧은 시간 안에 축적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