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해 31년 만에 무역수지(상품수지) 적자를 냈다는 소식은 일본 위기설의 결정판이다. 제조업 경쟁력 약화, 재정 적자, 정치 리더십 부재 등으로 일본의 미래는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엔고의 영향으로 달러가 물밀 듯 몰려들어 일본의 지난해 해외 기업 인수 금액은 사상 최대다. 국가 부채의 95%는 일본 국민이 보유하고 있어 디폴트 우려도 없다. 원전 가동 중단은 전 세계 최초로 일본이 탈원전 시대의 주도권을 틀어쥘 기회다. 일본은 특유의 ‘엄살’을 부리면서 속으로는 또 다른 칼을 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위기가 위기만은 아닌 이유다.
[위기의 일본] 위기의 쓰나미 일본 경제 내일은 있나
일본은 잊혀져 가는 것일까. 최근 서울 시내 일본어 학원 수강생이 전년 대비 20%가량 줄었다는 얘기도 있고 일본어 능력 시험 응시자(JLPT)는 2009년 16만9000여 명에서 2011년 11만여 명으로 줄었다는 소식도 있다. 엔고로 일본 여행은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 많다.

경제계에서도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타도 소니’를 외치던 삼성전자조차 일본 기업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 기업은 이른바 ‘6중고’로 ‘일본에선 제조업을 할 수 없다’며 탈일본 러시를 이루고 있다. 6중고는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단에 따른 전력난 ▷40%가 넘는 법인세율 ▷엔고 ▷엄격한 노동 규제 ▷환경 규제 ▷자유무역협정(FTA) 대응 지연을 뜻한다. 전력난을 뺀 다섯 가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여기에 지난해 3월 동일본 지진은 결정타였다. 그 결과 2011년 일본의 상품수지는 48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경상수지는 흑자지만 199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경상수지를 구성하는 상품수지(상품의 거래로 발생한 수지)는 1964년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대지진에 따른 심증이 상품수지라는 물증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 때문인지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의 경쟁자가 아닌 것이 되는 분위기다. 과연 일본은 이대로 관심 밖으로 멀어져 가는 걸일까.

일본 전문가들은 ‘그래도 일본’이라고 입을 모은다. 악재에 견디는 맷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0년 넘게 일본을 연구해 온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에 따르면 일본은 ‘위기를 겪으면서 한 단계 레벨 업 하기’의 달인이다. 외세의 압력이 거세지자 메이지유신을 단행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기술 강국으로 착실히 성장했다.

오일쇼크가 오자 고연비 자동차와 저전력 소비형 가전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한 바 있다. 그렇다면 원전 가동이 중단된 일본에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안 에너지 기술과 경험이 축적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일 교포 출신인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일본이 지진 복구 과정에서 태양광·발광다이오드(LED)·전기차·스마트그리드 등 차세대 산업 육성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위기의 일본] 위기의 쓰나미 일본 경제 내일은 있나
일본은 ‘위기 때 레벨 업 하기’의 달인

이우광 위원은 “원자력이 싼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 요소를 감안하면 결코 싼 것이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적으로 탈원자력 시대가 올 것이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도 아직 겪지 못한 상황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탈원전을 경험한 나라가 될 것이고 대안 에너지 기술과 경험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일본의 과거 저력을 봤을 때 결코 허황된 얘기만은 아니다. 이것이 일본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당장 한국에도 일본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 있다. 일본의 제조업은 탈일본 러시를 이루고 있고 엔고는 유례없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란 법은 없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엔저 현상으로 한국의 일본 관광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변화된 상황에서 한국은 원화 저평가 국면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지, 제조업 공동화 현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대비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를 위해 일본의 움직임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일본이 비록 상품수지에서 적자를 봤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경상수지에서 1250억 달러 흑자라는 점은 사회적 자본의 우수성과 경제 기반의 견고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일본 기업의 지난해 해외 인수·합병(M&A) 규모는 684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고로 풍부해진 달러가 해외투자의 불을 댕긴 것이다.

일본의 재정 위기도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국가 부채의 95%가 일본 국민으로부터 빌린 것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는 “빚을 가족한테 낸 격이니 남유럽 사태처럼 추심에 따른 디폴트 염려가 적다”고 보았다.

다만 위기에 빠진 일본이 체질을 개선하려면 정치 리더십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법인세 인하, 소비세 인상 등은 국민·야당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해결이 어려운 상태다. 벼랑에 몰린 일본이 경제적·사회적 개혁을 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되지만 정치적 변수 때문에 그 시기를 점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취재=우종국 기자

전문가 기고=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노근창 HMC투자증권 기업분석팀장·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서범세·김기남·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