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은 1978년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외국인 연구생,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하는 등 일본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1989년 귀국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일본 경제·산업·기업 등을 연구하며 일본연구팀장·해외연구실장 등을 지내다 지난해 9월부터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 경제를 쭉 지켜봐 왔던 이 위원은 한국이 ‘위기의 일본’을 지켜봐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수긍할 만한 이유를 들려줬다.
[위기의 일본] 위기마다 ‘레벨 업’…일본 얕봐선 안 돼
지금의 일본을 위기로 봐야 합니까, 기회로 봐야 합니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도 그간 벌어놓은 게 많아서 버텼는데 지금은 굉장히 힘든 상황입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국가 시스템·산업·기업에서 뭔가 큰 개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가능성은 있는데,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단언하긴 힘듭니다. 조금 더 고생하면 바뀔 여지도 있겠지요.

지금이 위기의 막바지라고 보시는지요.

일본은 궁지에 몰리면 굉장히 빨리 개혁합니다. 메이지유신이나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의 개혁이 그 예입니다. 지금도 돌파 움직임이 보입니다.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그 예입니다. 일본은 그간 자유무역협정(FTA)에 소극적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코너에 몰렸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기업들도 개혁의 움직임이 있습니까.

일본 전자 업체들은 대량생산과 단가 인하로 상징되는 디지털화에 실패했습니다. 경쟁력을 상실한 일본 가전·전자 업체들은 소비 가전을 버리고 산업 기전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도시바나 미쓰비시전기 등이 그렇습니다. 대량생산 가전에서는 대만·한국·중국을 이길 수 없지만 중전(重電: 산업용 전자 제품을 지칭하는 일본 용어)은 아직 한국이나 대만이 따라오기 힘듭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기계 산업이 강합니다. 앞으로 기계·제조와 전자가 결합된 기술이 발전할 겁니다. 정책적으로도 이런 분야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데, 대지진 이후 에너지·철도·수도 등의 인프라에서도 새로운 산업이 창출되지 않을까요.

정부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첫째, TPP 추진에서도 알 수 있듯 해외 통상 전략을 새로 짜고 있습니다. 둘째, 재정 문제인데 소비세를 5%에서 10%로 올리는 것을 추진 중입니다. 물론 국민이나 야당이 난리겠지만 ‘재정 일치(복지와 부담의 일체화)’가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셋째, 해외 진출 패턴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해외투자 비중은 20%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영국·독일은 30~40%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주로 국내 생산·수출이 경제를 이끌어 나갔는데 수출이 주니까 무역 적자가 났습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소득수지를 흑자로 내야 경상수지 흑자가 유지됩니다. 해외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기업은 알아서 나가겠지만 자원 분야의 인수·합병(M&A)은 일본 정부가 밀기 시작했습니다.

엔고가 제조업에는 악재지만 자본 선진국으로 가는 데는 기회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노무라가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는 등 글로벌화에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국제금융 기능은 저하되고 있습니다. 한두 개 회사가 잘한다고 해도 금융업 전체가 국제화됐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만 일본 기업의 내부 유보금이 굉장히 많은데, 경기가 좋지 않고 투자할 데가 없는 상황에서 해외로 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 대국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실제 일본의 해외 기업 M&A 움직임이 있습니까.

2011년 일본 기업에 의한 외국 기업 M&A가 사상 최고치인 5조 엔을 기록했습니다. 건수는 609건으로 매수 금액은 전년 대비 78% 증가했습니다. 가장 큰 규모의 M&A는 1조1086억 엔을 들여 세계 30위의 제약회사인 스위스 나이코메드를 일본 다케다제약이 인수한 겁니다. 도쿄해상홀딩스는 미국 보험사인 델파이파이낸셜그룹을 2050억 엔에 인수했습니다.
[위기의 일본] 위기마다 ‘레벨 업’…일본 얕봐선 안 돼
해외 직접투자도 실제로 늘어났습니까.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선진국 시장이 죽자 신흥국을 개척하면서 현지 생산, 현지 판매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를 지산지소(地産地消: 현지 생산, 현지 소비를 뜻함)라고 하는데, 특히 일용품·화장품 등 가격 경쟁력이 중요한 분야에서 가격이 싼 현지용 상품을 개발해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가오·시세이도·유니참·코세의 중국 진출이 그 예입니다.

최근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줄고 있는데, 한국이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필요성이)큽니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도레이·니코니세키에너지·아사히카세·스미토모화학 등 굵직한 회사들이 한국에 공장을 세우거나 합작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LG의 속도가 빠르니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소재·부품을 재빨리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알박·도쿄일렉트론 같은 반도체 장비 회사들도 한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에 있으면 한국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이 오라고 해도 오지 않았는데, 지난해부터 진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양국 간 경제 관계를 잘 풀기 위해서라도 최근 변화를 잘 지켜봐야 합니다. 한일 FTA는 잘 안 되고 있지만 한일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일본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도 일본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지금은 ‘원저·엔고’지만 일본이 재정 적자 해소를 위해 국채를 발행해 외국에서 소화하게 되면 금리가 오르고 엔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미국과 유럽이 안정되면 원고(원화 고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엔고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또 국내 산업 공동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잘 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쟁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다고 일본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에너지 분야입니다. 일본이 원전 포기 후 어떤 전략으로 갈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올해 원전을 모두 중단한다고 하는데 어떤 대안이 있는 겁니까.

천연 에너지, 스마트 그리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과연 원전이 안전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원전은 안전을 고려하면 코스트(비용)가 높아집니다. 지금은 원자력이 싸다고 하지만 노후화될수록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본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에너지 절약형 제품, 즉 연비가 좋은 자동차, 전기 덜 먹는 냉장고와 세탁기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원전 중단은 일본이 친환경 에너지 분야를 선도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도 앞으로 탈원전 시대에 에너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이는 미국이나 유럽도 겪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