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23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한국을 찾아 강연을 연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회사 내의 좋은 얘기는 회장에게 제일 빨리 보고되고 나쁜 얘기는 제일 늦게 보고된다”고 말했다. 소통의 원활함을 강조한 얘기다. GE에는 ‘워크아웃’이라고 부르는 회의가 있다. 기업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최고경영진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시스템이다. 투명하게 문제를 공유하는 열린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건희 회장도 신경영에서 이를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이 ‘비디오’ 보는 법이 회장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 회장이 어느 날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전용 공장을 만들자”고 얘기했다. 지금의 ‘무궁화전자’인데 삼성 수원 전자단지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곳이다.
이 회장의 지시로 회사를 세우기 전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6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애인 공장을 견학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고 도쿄에 와서 프로젝트 팀의 보고가 이뤄졌다.
팀장은 식사 자리에서 이 회장에게 자신들이 본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보고를 다 들은 이 회장은 ‘세 가지’를 지적하며 다시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식사가 끝난 후 팀원들이 내게 물었다.
“회장님이 장애인 공장에 대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죠? 우리도 전 세계를 돌며 지적하신 부분을 보긴 했는데,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뺐거든요. 혹시 비서실에서 미리 검토해 보고한 게 있나요?”
“우리도 처음 듣는다”고 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이 회장에게 직접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느냐. 팀원들이 굉장히 놀라워한다. 비결이 뭔가?” 그러자 “자네들은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도 본 적이 없나”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회장이 비디오를 많이 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회장의 말에 따르면 장애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이다.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는 완전히 다르다. 각각을 다룬 영화도 다르다. 비디오를 볼 때 한 번 보면 모른다. 장애인 자신의 처지에서 보고, 장애인의 절친한 친구로서 보고, 리더 역할에서 보는 등 다양한 시점에서 비디오를 보면 볼 때마다 느낌과 깨달음이 다르다. 드라마 속에 감춰둔 얘기들을 볼수록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신경영식 용어로 하면 ‘입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과 같았다. 갑·을·병의 다양한 입장에서 봐야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섯 번 ‘왜’를 하라”는 말은 이 회장이 요즘도 강조하는 사항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만큼 개개인의 성격과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다. 삼성과 NEC는 초기에 합작회사를 운영했다. 브라운관 산업이다. 지금까지도 삼성과 NEC는 관계가 좋아 반도체 개발도 서로 협력 회의를 운영할 정도다.
그런데 초기 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성 사람들이 학생처럼 질문을 연발하면 일본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답을 주는 광경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직원들의 연령대도 삼성엔 젊은층이, 일본엔 장년층이 많았다.
그런데 제품을 개발해 물건이 나오는 게 어느 시점부터 삼성이 NEC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56메가, 1기가 등을 NEC보다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 스승과 제자 같은데, 기업으로 보면 삼성이 훨씬 빨랐다. 신기한 일이다.
어느 연구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일본에 있는 후지산 꼭대기가 뾰족하다. 한국의 백두산이나 한라산엔 큰 연못이 하나 있어 물이 가득차고 넓다. 일본인들은 하나의 기술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사명감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세계적 기술자가 된다. 대신 옆의 다른 기술에는 관심이 없어 시너지 창출이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은 깊이는 없지만, 주변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얘기해서 이해하는 폭이 넓다. 협력·교류를 통해 시너지를 내는 데는 한국 기술자들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만 잘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다.” 68일간의 신경영 대장정이 끝나갈 무렵이다. 이 회장은 “앞으로 신경영을 하려면 헌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얘기했다. 다들 ‘기업에 웬 헌법이냐’고 생각했지만, 회장의 지시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의해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 회장은 ‘인간미·도덕성·예의범절·에티켓’이라는 다소 뜻밖의 ‘4대 헌법’을 얘기했다.
나중에 삼성전자에 와서 프로세스를 혁신하게 됐다. 고객 만족을 위해 어떤 프로세스를 만들 것인지 연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많은 조직과 직원들의 ‘도덕성’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 서로 인간미와 에티켓을 갖춰야만 프로세스가 잘 돌아갔다. 이 회장이 천명한 4대 헌법은 바로 이렇게 가장 근원이 되는 정신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 회장이 엄청난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4대 헌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미와 도덕성 갖춘 기업이 돼라
누군가 “에티켓과 예의범절의 차이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설렁탕집에 청년 두 명이 들어와 두 그릇을 시켰다고 하자. 이어서 노인 두 분이 들어와 똑같이 주문했다. 그렇다면 주인이 어떻게 해야 에티켓이고 예의범절일까.
서구의 에티켓은 선입선출이다. 먼저 주문한 사람에게 먼저 주는 게 맞다. 그러나 동양적인 예의범절로 치면 당연히 어른부터 갖다 드리는 게 맞다. 이럴 때 주인은 두 가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제 마음대로 결정하면 두 그룹 모두 반발하거나 섭섭해 할 것이다.
젊은이에게 가서 “미안하지만 노인들이 시장하고 힘들어 보이니 먼저 드리면 안 되겠나”라고 물으면 어떤 젊은이들이 안 된다고 하겠는가. 이게 바로 에티켓과 예의범절을 따로 말하는 이유다. 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모두를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미와 도덕성을 강조한 건 인재 양성에 관한 부분이다. 삼성에 들어온 직원들은 한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인재들이다. 부모에겐 가장 소중한 자식이다. 그들을 가치 있는 인재로 키워 성장시키면 그게 바로 인간미와 도덕성 있는 일이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다 형편없는 인재를 만든다면 인간미와 도덕성이 제로라는 뜻이다.
삼성도 초기에는 친인척들을 많이 활용했다. 하지만 그러면 잘못된 문제들이 벌어지기 쉽다. 이런 폐단을 알게 된 후부터 삼성 안에 친인척이 사라졌다. 혹여 친인척 관계에 있으면 오히려 승진이 늦어졌다. 회장의 특별 감사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라도 거래량이 늘거나 가격이 바뀌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따졌다.
자연스럽게 친인척의 권력 행사나 비리가 사라졌다. 회장이 그러니 사장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 관리에 80%를 썼다”는 이병철 회장, ‘인재 제일’을 외친 이건희 회장의 철학은 오늘날의 삼성을 있게 한 근본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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