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대규모 정전 사태 그 후


2012년 1월 어느 날 새벽, 전력 공급이 한계치에 도달한다. 이상 한파로 수은주가 급강하하면서 난방 수요가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냉기에 잠을 깬 시민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몸을 떨었다. 재난 예고 방송이나 문자 메시지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올겨울 전력대란 시나리오다.

9·15 대규모 정전 사태는 위기의 예고편일 뿐이다. 과연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요동치는 전력 수요…‘최악의 겨울’온다
지난 10월 18일 삼성동 한국전력 별관 5층. 지문 입력기를 통해 신원 확인을 하고 나서 한국전력거래소 중앙급전소에 들어섰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전광판에 우리나라 전력 생산과 공급 현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각종 수치와 그래프들이 떠있다.

모든 데이터는 원격 시스템을 통해 2초 주기로 자동 업데이트된다. 오후 4시 10분 현재 설비 용량 7881만kw, 공급 능력 7109만kw, 현재 부하 5854만kw, 공급 예비력 1255만kw, 예비율 21.4%를 가리키고 있다. 공급 예비력은 공급 능력에서 현재 부하를 뺀 수치다.

9월 15일은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현재 부하’가 오전부터 상승 곡선을 그리며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 사용이 많은 한여름에도 전력 피크는 오후 3시쯤 나타나 기껏해야 2시간 정도 유지되다 잦아드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날은 오전부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더니 오후 6시가 돼서야 가까스로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그것도 순환 정전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뽑아든 뒤였다.

초가을이 무색한 찜통더위가 이날 전국을 강타했다. 서울이 평년보다 5도 이상 높은 섭씨 영상 31.3도를 기록했다. 대구는 9월 중순 기온으로는 104년 만에 최고라는 34.2도를 찍었다. 경남·경북·전남 일대에 폭염 주의보가 발령됐다.
요동치는 전력 수요…‘최악의 겨울’온다
전기 난방 확산…여름철 사용량 추월

9·15 정전 사태 이후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때문인지 중앙급전소의 분위기도 왠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다. 전력거래소 이사장이 전격 경질된 것은 물론 급전부장 등 당시 근무자들도 징계 처분을 받았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미국의 급전소에는 ‘당신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신속하게 판단하고 과감하게 조치하라’는 문구가 걸려 있고 면책권도 부여된다”며 “근무자들의 사기 저하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올겨울 전력대란 가능성이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지난번보다 훨씬 심각한 정전 사태가 우려된다고 경고한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겨울철 전력대란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며 “날씨가 가장 큰 변수”라고 말했다. 전력거래소 한 관계자도 “2001년 전력거래소가 만들어진 이후 이번 겨울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수년간 전력 수급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진행돼 왔다는 게 전력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오태규 한국전기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전력 여건이 요동치고 있다”며 “전력 산업이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 수급의 구조적 변화는 최대 전력 사용량 그래프를 살펴보면 선명하게 나타난다. 바로 겨울철 난방 수요의 폭증 현상이다. 에어컨 보급이 확대된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의 연중 전력 피크는 전통적으로 여름철 7~8월에 나타났다. 여름철만 되면 냉방 온도 낮추기 캠페인이 벌어지곤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유가 등으로 전기 난방 설비가 인기를 끌면서 겨울철에도 전력 피크가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09년에는 여름철 고점을 추월해 버렸다. 2008년 여름 피크(6279만kw)가 겨울 피크(6095만kw)를 앞질렀지만 2009년에는 겨울 피크 6321만kwm, 여름 피크 6265만kw로 순서가 뒤집혔다. 2010년 연중 피크가 여름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올해 다시 겨울 피크가 강세를 보였다. 이런 추세라면 올겨울 전력 사용량이 사상 최대치를 갈아 치울 게 확실해 보인다.

겨울 난방 수요의 증가 폭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오태규 책임연구원은 “정부에서 경제성장률 등을 반영해 2년마다 전력 수요 기본 계획을 수립한다”며 “난방 수요의 비정상적인 증가로 이 수요 예측이 번번이 빗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 패턴의 급변동으로 전력 공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발전소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정비 기간 확보가 여의치 않게 된 것이다. 거대한 금속 기계장치인 발전기는 최소한 매년 한 번씩 대대적인 분해 정비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일단 정비에 들어가면 보통 1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전력 수요가 많은 겨울과 여름을 피하기 위해 봄가을 짧은 기간에 많은 발전소들이 정비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갈수록 봄과 가을이 줄어들고 있다.
요동치는 전력 수요…‘최악의 겨울’온다
9·15 정전 사태도 여름철 피크가 끝나자마자 올겨울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많은 발전소들이 서둘러 예방 정비에 들어가면서 벌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월 이상 한파로 서울 기온이 섭씨 영하 17도 밑으로 떨어지면서 전력 수요도 사상 최대치인 7314만kw를 기록한 바 있다.

우석훈 소장은 “최근 전력 수급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가격 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전기 요금이 지나치게 싸다는 것이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전 사태 이후 수많은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격 문제를 손보지 않는 한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겨울철 전기 난방이 늘어난 것은 고유가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2008년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깨끗한 전기로 대거 ‘에너지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요즘 음식점에가면 석유를 쓰는 난방 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전기 온돌이나 전기 온풍기로 바꿔달았다. 2005년 전체 전력 수요 중 난방 수요가 18%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이 수치가 25%를 뛰었다. 일단 전기를 쓰기 시작하면 다시 석유 난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석훈 소장은 “공장들도 가격이 비싸고 다루기 곤란한 벙커C유나 경유 설비를 전기 설비로 대거 교체했다”고 말했다.
15일 오후 자동차들이  신호등이 꺼진 서울 청계천 일대를 지나가고 있다. 이날 한국전력의 제한송전으로 전국 곳곳에서 정전사태가 일어났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
15일 오후 자동차들이 신호등이 꺼진 서울 청계천 일대를 지나가고 있다. 이날 한국전력의 제한송전으로 전국 곳곳에서 정전사태가 일어났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
급격한 수요 증가로 전력 수급은 수년째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을 오르내리는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오태규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발전설비 건설이 지연된 것은 없다”며 “오히려 건설 일정을 앞당겨 짓고 있는데도 수요를 쫓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발전소 건설에는 보통 5~10년이 걸린다. 공사 기간이 가장 짧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도 2년 정도가 소요된다. 게다가 수요가 증가한다고 무조건 발전소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태규 책임연구원은 “전기가 부족한 것은 매년 1~2주 정도 하루 2~3시간에 불과하다”며 “이를 위해 막대한 돈을 무조건 쏟아 붓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요동치는 전력 수요…‘최악의 겨울’온다
값싼 전기 요금의 복수

지난해 한국 경제는 6.1%의 성장을 달성했다. 반면 같은 기간 전력 수요는 이보다 훨씬 높은 10% 증가율을 기록했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10%대 수요 증가율을 신흥국에서나 나오는 수치”라며 “이 상태로는 발전소를 아무리 지어도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기 요금을 적정 수준으로 인상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다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부담을 늘리는 이 정책을 선뜻 지지할 정치인들 역시 많지 않다. 우석훈 소장은 “저소득층은 바우처(쿠폰) 등 리펀딩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며 “진짜 문제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 살면서 월 100만 원 이상 전기 요금을 내고 있는 고소득층의 반발”이라고 말했다.

이정전 명예교수는 “이제 국민들이 전기 요금을 올릴 것인지, 아니면 원자력발전소를 더 지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국민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대가를 지불하느냐다.

이 교수는 “대부분의 국민은 전기 요금 인상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부담해야 할 천문학적인 금액에는 눈을 감는다”고 말했다. 9·15 정전 사태 직후 정부는 외부 전문가들로 ‘전력 위기 대응 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가동하고 있다. 이 TF는 조만간 그동안 활동을 토대로 포괄적인 장·단기 종합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요동치는 전력 수요…‘최악의 겨울’온다
과연 올겨울 전력대란이 현실화될까. 지난번 가을철 이상고온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100년 만의 한파가 닥친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겨울철 전력 피크는 주로 심야 시간대에 나타난다. 대규모 정전 사태가 또다시 벌어진다면 이 시간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상청은 올겨울 한파가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예보하고 있다.

취재=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