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복도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햇빛도 들지 않는 3.3㎡짜리 쪽방,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수염이 자란 까칠한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춥고 배고픈 이미지. 인기리에 방영 중인 시트콤 ‘하이킥-짧은 다리의 역습’을 비롯해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고시생 이미지는 주로 그랬다.

그러나 대한민국 고시의 메카 신림동 고시촌의 현실은 좀 달랐다. 여기저기 ‘풀 옵션’을 내건 최신식 원룸 건물들이 즐비하고 홍대나 강남에서 볼법한 멋진 인테리어를 내세운 카페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고시생들의 생활수준이 달라진 것과 함께 로스쿨 이후 고시생이 줄고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변화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지난 10월 11일. 일명 ‘고시촌’으로 불리는 서울 신림9동(현 대학동) 한림법학원 인근에 ‘대한민국 고시특별시’라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옛 동방종합시장 자리에 들어서는 일성건설의 오피스텔 건축이 한창인 그곳에는 ‘고시 특화형 오피스텔’이라는 광고 문구도 함께 눈에 띄었다. 50~119㎡형(15~36평형) 오피스텔 162실이 들어설 예정으로 빌트인 시스템에 독서실·상가·학원·주거·조깅 트랙까지 ‘풀’로 갖춘 그야말로 고시‘촌’ 내 ‘특별시’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촌에서 시, 그것도 특별시로의 달라진 ‘신분’은 비단 특정 구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길에서 만난 한 고시생은 “예전에 고시촌은 춥고 배고픈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고시의 메카로 고시원·고시학원·고시서점·고시식당 등이 즐비했던 고시촌에 변화가 일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3.3㎡짜리 ‘쪽방’으로 대변되던 고시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부분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A 부동산 중개업자는 “2~3년 전부터 원룸으로 바뀌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다 개조됐고 옛날식 고시원은 10%도 채 남지 않았다”며 “그나마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90% 이상이 원룸으로 리모델링

아닌 게 아니라 기자가 직접 둘러본 고시촌 일대는 ‘각방 드럼세탁기·벽걸이에어컨·냉장고·싱크대·인덕션·인터폰 등 최신 시설 완비’를 내건 ‘풀 옵션’ 원룸들이 즐비했다. 달라진 건물 외경만큼이나 이름도 ‘고시원’ 대신 ‘○○하우스, ○○원룸텔’ 등이었다.

올라갈수록 방값이 저렴해지는 언덕 부근에 남아 있는 옛날식 고시원 한두 채를 제외하면 이미 꼭대기까지 원룸 건물이 들어섰거나 일부는 원룸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곳에서 5년째 고시를 준비 중이라는 고시생 김모 씨는 “내가 있는 고시원을 중심으로 주변 고시원들이 돌아가면서 원룸 개조 공사를 하더라”며 “우리 고시원도 일부 층은 원룸으로 리모델링했다”고 말했다.

고시원들이 이처럼 원룸으로 바뀌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고시생들의 생활수준이 달라졌다는 것.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월세 10만~15만 원에 공동 화장실을 쓰는 쪽방 고시원에 요즘 누가 가려고 하겠느냐”며 “그래서 낙후한 고시원은 공실률이 높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동산 중개업자도 “고시생 수준이 달라졌다”며 “요즘은 고시도 돈 없으면 못하는 세상 아니냐”고 덧붙였다.

고시촌에 몇 년 전부터 원룸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유는 또 있다.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후 고시생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이면 사법시험이 완전히 폐지되고 2013년에는 외무고시도 폐지되는 등 새로운 고시 인구 유입 계기가 없어 직장인 세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셈이다.

고시생 김모 씨는 “고시촌은 사법고시생들이 절대 대세인 곳”이라며 “시험일을 기준으로 사람이 들고 나는 게 확실한 동네라 시험이 끝나는 2, 6월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9~11월 사이엔 고시 준비생들이 들어오는데, 지금은 한창 피크인데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인근 B 부동산 중개업자도 “로스쿨 이후 고시생들이 많이 빠져나가 50% 이상 줄어든 것 같다”며 “지금은 방을 많이 찾을 시기인데 추석 이후로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설명했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로스쿨 이후 직장인 상주인구가 절반

이처럼 고시생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직장인들이 들어오고 있는 추세다. 고시원 방 서너 개를 합한 13~17㎡(4~5평)형 원룸 가격이 월 40만~50 원 선으로 인근보다 싸고 밥값 등 생활물가도 저렴해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게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설명이다. 직장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비해 공실률이 높아 일부 건물주는 애를 태우고 있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일반 주택에 거주하며 세를 주고 있다는 한 주민은 “여기저기 빈방이 있다고 내건 것을 봤겠지만 요즘 빈방이 천지”라며 “우리도 저 아래쪽 큰길까지 전단지를 붙여 겨우 직장인 세입자를 구했다”고 했다. 또 “시세도 전만 못하다”며 “15년 전에도 방 세 개에 월세 80만 원을 받았는데 지금은 60만 원밖에 못 받는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원룸 공급이 너무 많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생기는 것마다 원룸”이라며 “월세를 받기 위해 살림집들을 다 원룸으로 바꾸는 추세”라고 말했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고시생이 줄고 직장인 거주자가 많아지면서 상권도 변했다. 고시학원·고시식당·서점·독서실 등 고시생을 상대로 하던 업종들은 손님이 줄어 아예 문을 닫았거나 업종 변경을 고민 중인 곳도 상당수다. 고시촌에서 20년 넘게 장사해 온 상원서적은 최근 오프라인 매장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카페가 들어섰다.

한 고시생은 “상원서적의 폐업은 고시생들에겐 충격적인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학원들도 강의를 변경하는 등 변화에 발맞추고 있다. 3년째 고시촌에 거주 중이라는 또 다른 고시생은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전향했을 때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게 노무사 시험”이라며 “작년만 해도 노무사 학원이 2개에 불과했는데 5개로 늘었다”고 전했다. 고시생들을 대상으로 고시식당을 운영하는 한 업주는 “한 끼에 70~75명 정도 왔는데 요즘은 50명 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커피숍, 편의점, 분위기 좋은 음식점 등은 그 수가 늘었다. 허름한 동네 슈퍼는 거의 편의점으로 대체되고 있고 상권이 발달한 메인 도로 주변으로는 10m 간격으로 커피숍이 들어서 있을 정도다. 한 고시생은 “몇 년 전에 비해 커피숍이 진짜 많이 늘었다”며 “고시생 중 여성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것도 한 이유”라고 말했다.

한편 외국인 유입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고시생들이 나간 값싼 고시원에 외국인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 것. 한 원룸 건물주는 “주변에서 외국인 거주자를 한둘 봤다”며 “치안 문제도 있고 주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쪽방’ 고시원 대신 ‘원룸촌’…상권도 변화
취재=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