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람이 곧 혁신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자연이 가르쳐 준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 리더십
내가 태어난 해는 8·15 광복을 맞았던 1945년이다. 당시 아버지는 중국의 만주철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셨는데, 그 덕분에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 아닌 중국 베이징(北京)이 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두 살배기 아기 시절이지만, 우리 집은 베이징역 근처 철도 관사에서 살았다.

당시 베이징에는 한국(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는데, 광복(일본 입장에선 패망) 직후 모두 화차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우린 그곳에서 다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당시 귀국 행렬에 나섰던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를 여러 번 들려주셨다. 늘 하시던 얘기가 “베이징역에 가보니 그 추운 날 한국인은 아무 준비 없이 자기 보따리만 가져왔더라”는 말이었다. 그 덕분에 난 기억에도 없는 아기 때 일을 지금까지도 눈으로 본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귀국에 나선 사람들은 한국·일본을 가릴 것 없이 살던 번지별로 열차 호수를 통보받았다. 제 식구들 챙기기에 급급한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 사람들은 정해진 칸별로 따로 모여 철저히 귀국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붕이 없는 열차인 것을 알고 화물차에 기둥을 설치하고 이불을 뜯어 이어 뚜껑을 만드는 식이었다. 일본인들은 심지어 화장실 칸까지 따로 준비했다.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노약자를 배려했고 음식물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대응했다.

비록 패전 국민이었지만 귀국길만은 굉장히 안락한 여행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저 제 손에 쥔 보따리뿐이었다. 추운 겨울, 지붕도 없는 열차로 다롄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는 생각만 해도 빤하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베이징 탈출 이야기.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부터 난 앞서가는 국민이란 어떤 것인지, 조직화된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하는 방법을 달리하면 효율이 얼마나 오르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게 바로 선진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과의 차이였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자연이 가르쳐 준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 리더십
어린 시절부터 깨달은 선진국의 경쟁력

귀국 후인 1950년 우리 집은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까까머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쟁놀이밖에 없었다. 보고 들은 게 전쟁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새로운 전략을 짜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전략을 세우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남들보다 비교적 유연한 발상과 전략적·창의적 사고에서 앞서는 것도 당시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는 생각이다.

1·4 후퇴로 피란을 간 밀양에도 기차역이 있었다. 동네에서 10리쯤(4km) 떨어진 청도군에 5일장이 섰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끼리 끊임없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장터에 갈 때면 으레 여러 명이 팀을 이뤄 갔고,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12월에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훈동에 집을 마련하셨다. 시골에서 매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촌놈은 서울 학교에 전학하자마자 꼴등을 했다. 시골 아이들과 달리 서울 친구들은 그때부터 벌써 성적 올리기에 열심이었다.

그때부터 난 거리낌 없이 쏘다니던 생활 방식 대신 서울 아이들처럼 틀에 박히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6학년 2학기에 이르자 성적이 좋아져 반장도 맡았다. ‘교동국민학교’면 당시 일류 학교였는데 1학기 중간쯤 벌써 1, 2등을 다툴 정도가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울 아이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키운 체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신적으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체력만큼은 서울의 그 어떤 친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자연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냈던 학생이 마음먹고 집중하면 오히려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난 스스로의 체험으로 깨달았다.

얼마 전 읽은 ‘일본전산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회사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창의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인재를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양성 속에서 독창적 경쟁력을 키워내는 조직 문화가 바로 일본전산의 힘이다.

어떤 해는 운동선수만 뽑고, 어떤 해는 대학 낙제 경험이 있는 학생들만 뽑는 채용 방식은 우리에겐 무척이나 낯설다. 낙제생에게 “그것을 후회하는가,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을 던져 “후회하고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떨어뜨렸다고 한다.

대신 “다음에도 그렇게 의지대로 하겠다”는 사람만 뽑았다는 일본전산은 전 세계 그 어느 기업보다 강한 인재 경쟁력으로 세계 정밀 소형 모터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전교 꼴등서 학급 반장으로

전기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귀국 후 잠시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에서 일하셨다. 6·25로 파괴된 영월발전소 재건에도 참여하셨는데, 완공 후 준공식 날 벌어진 잔치에서 알코올음료를 잘못 마셔 시력이 크게 훼손되는 불행을 겪으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영월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커다란 컨베이어벨트를 처음 본 감동으로 남아 있다. 기계에 매료된 건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일 게다.

아버지는 밀양 피란 생활 동안 방앗간을 경영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방과 후 방앗간에 들러 아버지 대신 기계를 돌리고 손님들이 오면 안내도 하는 일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때 이미 방앗간 안의 모든 기계를 다룰 줄 알았다.

새벽이 되면 소달구지가 지나간 길에는 소똥이 가득했다. 쇠똥을 주워 거름을 만들고 산과 들로 다니며 친구들과 소를 먹였다. 서울서는 경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억이다. 이 밖에도 틈만 나면 낙동강에 나가 은어를 낚았다. 획일적인 암기식 교육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이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일수록 체험 교육을 무척 중요시한다. 무언가 남을 위해 일해본 사람, 부모나 가정을 위해 심부름을 하고, 이웃을 위해 청소를 해 본 사람들이 결국 조직 사회에서 서로 화합하고 소통하며 사는 기본 체질을 갖추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지메(집단 괴롭힘)’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일본에서도 그 이유를 연구해 보니 ‘누구에게도 도움을 줘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일수록 왕따를 시키더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일본 정부는 각 가정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에게 일을 시켜라, 심부름을 시켜라, 학교서도 교육과정을 바꿔라’는 지침을 내렸다.

소를 먹인 건 소를 위하는 일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도 집안일이었고, 마당 청소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의 생활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나 아름다운 산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이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독서량이 절대 부족한 요즘 아이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세계 명작’, ‘밀림의 왕자’ 등 어릴 때 읽은 수많은 책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다. TV도 없던 그 시절엔 동네에 책을 빌려주는 곳이 꽤 많았다.

당시 상당히 인기 있던 ‘학원’ 같은 잡지가 사라진 것도 아쉽다. 그런 문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터넷 요약본이 대체했다. 요약된 정보로 움직이는 환경에서 학습하는 것과 원전을 읽으며 생각의 틀을 만들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난 지금도 사람을 보며 관리할 때 ‘삼국지’, ‘초한지’ 등의 인재들을 떠올리며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인재로 키울 것인지 고민하곤 한다. ‘삼국지’는 10번 이상 읽었다. 요즘 최소한 한 달에 책 두 권을 읽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떠났던 무전여행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친구들과 함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떠났지만, 막상 어느 동네를 가도 ‘학생들이 고생이 많다’며 쉽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꼭 보리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냈고, 손에 차비도 쥐어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 문화다. 풍요와는 거리가 멀던 시절이었지만 인심은 지금보다 훨씬 후했다.

당시는 학생들의 여행을 권장하는 분위기였고, 어른들이 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시됐다. 이게 우리의 문화이자 인심이다. 사는 건 훨씬 풍족해졌지만 사람 냄새는 갈수록 옅어지는 것 같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