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전진기지

청담동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갤러리다. 갤러리가 청담동 트렌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청담동 일대에만 65개의 갤러리가 포진해 있다. 청담동이 단지 패션·트렌드의 전진기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갤러리가 이렇게 많은 것에 놀랄지도 모른다.

미술 작품의 전시 공간일 따름인 갤러리 운영은 어떻게 보면 부자들의 취미 활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돈 많은 사모님’들의 롤모델인 홍라희 씨가 리움미술관 관장(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을 맡고 있고 노소영(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인) 씨도 나비아트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신정아 스캔들로 유명세를 떨친 성곡미술관의 박문순 관장도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이들 그룹 회장 부인들이 운영하는 갤러리들은 강북에 자리 잡은 것이 특징이다. 리움미술관은 한남동, 나비아트센터는 서린동, 성곡미술관은 신문로에 자리 잡고 있다. 가나아트센터처럼 전통적으로 유명한 갤러리들은 평창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또한 평창동에 전통적인 부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청담동에 자리 잡은 갤러리들은 강남 부자로 대표되는 신흥 부자들이 만들어낸 곳이다. 2000년대 들어 부의 흐름이 대거 강남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1999년 말 대치동에 타워팰리스 입주가 시작됐고, 분당이 주목받고 판교신도시가 만들어진 것도 2000년 이후 불과 1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청담동에 갤러리 오픈, 유행처럼 번져
갤러리만 65개…‘강남 스타일’의 시작
평창동에 있던 서울옥션이 강남점을 낸 것을 비롯해 청담동에선 갤러리 오픈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물론 청담동에도 긴 역사를 가진 갤러리들이 있었다. 최근 검찰 수사로 대표가 구속된 서미갤러리를 비롯해 우리들병원이 운영하는 오룸갤러리, 화랑협회장 출신인 박여숙 대표가 운영하는 박여숙화랑 등이다.

부자들의 문화에 갤러리가 자리 잡은 것은 갤러리가 여러모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갤러리를 오픈하면 단순히 돈만 있는 부자에서 문화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효과가 있다. ‘~사장 부인’, ‘~사모님’으로 불리다가 ‘~갤러리 대표’, ‘~화랑 관장’ 명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부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미술 작품을 통한 부의 창출 또한 매력적인 비즈니스다. 자질을 갖춘 신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가 그들이 유명해진 후 작품을 고가에 팔면 그 자체로 이익이다.

또 작가가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팔 때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다. 작품을 보러 오는 다른 부자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게다가 미술 작품 거래는 세금이나 양도세가 부과되지 않는 영역이어서 부의 이전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 많은 비자금 사건에서 갤러리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작고한 국내 작가의 작품 중 6000만 원 이상짜리 미술품을 거래할 때 차익의 20%를 양도세로 물리는 미술품 양도세법은 2012년 12월 31일까지 유예된 상태다).

빌딩 주인에게도 갤러리가 입주하면 건물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환영받고 있다. 갤러리 운영만 잘된다면 투자자·작가·빌딩주 모두가 만족해하는 비즈니스인 것이다.

청담동에서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VIP마케팅 업체 PRMC의 오유경 실장은 “부촌의 히스토리는 갤러리에서 시작된다. 뉴욕에서도 트렌디한 명품 업체들이 플래그십 매장을 내는 소호와 첼시 지역도 갤러리촌으로 불린다. 미술품을 보러 상류층이 자주 방문하다 보면 고급 식당이 생겨나고 명품 아이템숍들이 따라서 오픈하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땅값이 오른다. 미슐랭가이드에 소개되는 레스토랑이 소호와 첼시 지역에 굉장히 많다”고 설명했다.

강북의 부촌과 다른 청담동의 특징은 새로운 문화를 도입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평창동·성북동 등에 거주하는 강북 부자들은 자수성가형으로 해외 생활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강남의 부자들은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오랜 시간 지낸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 없는 새로운 문화를 들여오는 데 적극적이다. 의식주와 관련된 새로운 트렌드는 청담동에서 시작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청담동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정착되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식이다. 이제는 최신 브랜드 매장이 청담동에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해질 정도가 됐다.
갤러리만 65개…‘강남 스타일’의 시작
신흥 부자, 해외 신문화 도입에 적극적

패션 트렌드는 물론이고 골목골목마다 특색 있는 레스토랑도 청담동이 주도하고 있다. 인사동과 평창동에도 갤러리가 많지만 청담동처럼 이색적인 레스토랑이 많지는 않다. ‘브런치(아침을 뜻하는 breakfast와 점심을 뜻하는 lunch의 합성어)’ 문화가 시작된 곳도 청담동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인기를 끌면 중저가 브랜드가 이를 따라하면서 대중적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파티 문화가 시작된 것도 강남, 특히 청담동·압구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갤러리 등의 문화 공간을 활용한 파티가 지금도 청담동 안쪽 길에서 종종 벌어진다.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개최하는 소규모 파티가 벌어지는 금요일 밤이면 청담동 골목 안쪽이 고급차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급 플라워 숍이 들어선 것도 비슷한 이유다. 플로리스트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해외에서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획득해 새로운 꽃 문화가 퍼진 것도 청담동 일대에서부터다. 붉은 장미와 안개꽃, 또는 백합 등 단순한 꽃에서 제비꽃·수국 등 예술성이 가미된 부케를 소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지역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고가의 가구류가 처음 들어오는 곳도 청담동이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덕시아나 침대 매장도 청담사거리에 있고, 독일제 비트라 같은 고급 가구 숍도 청담사거리 일대에 즐비하다.

청담동이 뜨면서 임차료가 올라가 터줏대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기도 한다. 청담동 일대는 한때 충무로를 떠난 영화사들이 둥지를 틀면서 제2의 한국 영화 메카가 됐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높아진 임차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제작사 아이필름은 2008년 청담동에서 고양시 화정동으로 옮겼다. 아이필름과 함께 있던 연예인 매니지먼트사인 아이에이치큐는 청담동에 남아 있다. ‘두번째 사랑’의 나우필름도 같은 해 청담동에서 부천시 춘의테크노파크로 옮겼다. ‘태극기 휘날리며’ 등을 제작한 MK픽처스도 반포동에서 종로구 필운동으로 옮겼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