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과 행복의 함수관계

우리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돈’에 대한 생각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엘리트층들이 전세를 살더라도 ‘실패자’라는 생각이 덜했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마치 ‘실패자’가 된 것처럼 대하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이른바 ‘문제아’들은 렉서스나 벤츠 등 외제차를 몰고 동창회에 나타나는 반면 이른바 ‘범생이’들은 ‘쏘스리(현대자동차 쏘나타3)’를 몰고 나타난다.

동창회를 주도하는 이들은 ‘렉서스’들이고 ‘쏘스리’들은 잔뜩 주눅이 든 채 돌아간다. 다음에는 동창회에 나가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런 가상의 에피소드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농담 가운데 오래된 농담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부자가 대접받은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1015년께 엔셤의 수도원장 앨프릭은 동트기 전에 일어나 땅을 갈고 수확물을 거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창조한다고 강조했다.

수백 년 동안 정통 경제학 이론들은 ‘일하는 계급’들이 사회의 부를 창조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부자들은 사치와 방탕으로 자원을 낭비할 뿐이라며 경제학적으로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욕망을 절제하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물질은 행복을 좌우하지 않는다

1723년 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꿨다. 맨드빌은 수백 년 동안 전해오던 경제적 사고와 반대로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은 ‘빈자’가 아니라 ‘부자’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이 지출하기 때문에 그들 밑의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맨드빌은 욕심이나 사치를 악덕이라고 하는데, 바로 개인의 악덕 때문에 나라가 잘살게 되는 것이고, 진짜로 이 악덕을 다 없애고 미덕만을 갖게 된다면 가난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덕이라고 하는 것이 죄다 이기심에 허울을 씌운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즉 개인의 이기심과 이익 추구 행위가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는 원동력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어두운 자본의 얼굴인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날 ‘부자론’은 맨드빌의 우화보다 더 나아간다. 즉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도덕으로나 능력으로나 더 ‘낫다’고도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신의 지능과 능력만을 기초로 위엄 있고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고 주장한다. 즉 가난한 사람은 ‘실패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이해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부자가 아니라고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다. 존 러스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으면 ‘쏘스리파’들도 다소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은 ‘최후의 사람에게(1860)’에서 ‘부’에 대한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면서 경제적 능력주의의 과대평가를 경계한다. 그는 친절·호기심·감수성·겸손·경건·지성 등을 ‘삶’이라면서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위안을 주는 말인가. 앞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물질적인 부가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그 말만은 진실이다. 가난함이 행복과 비례한다는 말도 역시 진실이 아니듯이….

이 글을 쓴 날은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무려 2500여 년 전에 삶의 부조리를 느끼고 욕망의 감각세계를 떠난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역시 물질적인 부가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그가 왕궁을 떠난 이유도 바로 그 깨달음에 있다.

물론 가난함보다 부유함이 덜 불편한 것은 불변의 진실이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다고 행복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삶이 불편하다면 티베트 라마승의 이야기기인 영화 ‘삼사라(Samsara)’를 보는 것도 어떤 삶의 기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삼사라’의 배경이 되는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고산 사막지대인 리다크의 전경이 영화를 압도한다. 이 영상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단한 삶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생과 사의 순환’이라는 뜻으로 모든 생물의 생명은 그것이 쌓은 업보인 카르마(Kar-ma)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진다.

잠시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해 훌륭한 수도승으로 자란 타쉬는 3년 3개월 3일간의 고된 수행을 마치지만 마을에서 만난 아름다운 페마(중리티 분)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결국 절을 떠나 결혼하고 아들 카르마를 낳는다. 타쉬는 절을 떠난 속세의 다양한 욕망을 경험하며 선택의 순간을 맞는데 결국은 불가로 재귀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꼭 재회할 것이다. 그때 수천 가지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 것인지 말해 보라.”

타쉬의 스승이 보낸 유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어쩌면 주인공은 결혼하면서 욕망에 충실하며 살았지만 끝내 한 가지의 욕망, 즉 깨달음의 욕망을 정복하지 못했고 재출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주인공은 색계의 유혹에 환속을 결심하면서 스승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다섯 살 때부터 중이 된 나에게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뭘 가져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을 버리라는 것입니까.” 이는 재물이든 결혼이든 가져보거나 경험해 본 후에 그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이든 경험해 봐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게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3계 가운데 욕계와 색계일 것이다. 타쉬는 바로 무색계의 세계로 들어갔으나 욕계와 색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환속했다. 욕계와 색계를 경험하고서야 다시 무색계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그의 스승은 욕계와 색계를 끝내 멀리하고 무색계에서 살았는데 과연 깨달음을 얻었을까.

욕망은 충족된 후에야 포기할 수 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에 따르면 사람들은 좀 더 근원적인 욕구(needs)가 만족되고 나서야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매슬로는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는데,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사회적 욕구<위신·자존·지위에 대한 욕구<자아실현의 욕구 순으로 사람들은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야 비로소 상위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또한 갑자기 하위 욕구에 불만족이 생기면 상위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보다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매슬로의 주장에 따르면 어쩌면 타쉬의 선택이 욕구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다시 귀의함으로써 남겨지는 부인과 자녀 등 가족들이다. 이는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다.

여기서 다시금 ‘선택’이 중요해진다. 아들과 딸 중에서 하나만 살릴 수 있다는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의 삶도 이러한 선택의 연속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기 수양 혹은 깨달음과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모두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어렵지만 사람들은 달콤함과 쾌락이 동반하는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너도나도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영화에서 배울 수 있는 비즈니스는 판 나린 감독의 프로페셔널 정신이다. 그는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그 덕분에 영화는 한없이 아름다운 세상의 한곳을 완벽하게 스크린 안에 담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판 나린 감독이야말로 물질을 초월한 순수한 ‘무색계’의 정신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었던 것은 아닐까. 그 덕분에 전 세계인들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영혼의 순수 세례를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은 부처의 원천이다.’ 조계종 법전 대종정의 말이다. 물질적 욕망으로 잠시 심란하다면 ‘마음의 부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위안해 보자.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