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흔드는 ‘제4의 파워’ 정체

323조 원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파워는 어느 정도나 될까. 2010년 말 국내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은 1141조8854억 원,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국내 위탁 투자액은 54조9754억 원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4.8%다.

수치상으로는 국민연금이 국내 모든 상장 주식의 지분 4.8%를 평균적으로 갖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국내 주식 투자액의 절반가량은 위탁 운용(25조6280억 원)이기 때문에 직접투자액(29조3474억 원) 만으로 국민연금의 비중을 계산하면 2.57%로 떨어진다.
외국인 밀어내고 시장 ‘좌지우지’
그러나 이것은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실제로는 국민연금이 모든 상장사 주식을 동일한 비율로 갖고 있지는 않고, 0%에서부터 최대 9.66%(LG상사)까지 보유하기도 한다.

LG상사는 구본준 부회장의 지분 3.01%를 포함한 43명의 친인척이 1% 내외의 주식을 십시일반 합해 27.79%의 지배력을 갖고 있다. 그 외 5% 이상 주식 소유자는 9.66%를 보유한 국민연금과 5.38%를 보유한 KB자산운용이다.

LG상사의 지배 주주와 대립해 국민연금과 KB자산운용이 힘을 합치면 지배력은 15.04%다. 소액 주주 비중은 55.14%인데, 이 중에는 LG상사 지분의 3~4%를 보유한 자산운용사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므로 실제 표 대결까지 간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이 제조업·서비스업 기업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금융회사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금융지주사와 증권회사는 자산운용사를 통해 상당량의 주식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연금은 25조 원을 위탁 운용하는 ‘큰손’ 고객이기 때문에 자산운용사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도 쉬운 조건이다.

2007년 펀드 열풍과 함께 ‘펀드 자본주의’라는 말이 회자된 바 있다. 펀드에 시중 자금이 몰리면서 자산운용사들이 보유하는 상장사 지분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다시피 했던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박현주 회장을 주주총회를 앞둔 대기업 담당자들이 만나려고 줄을 섰다는 후문도 있었다.

‘펀드 자본주의’ 위에 ‘연금 자본주의’?

펀드 열풍이 한 풀 꺾인 현재 국민연금이 막강한 세력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증권사 법인영업팀들이 국민연금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저녁마다 기금운용본부 앞에 줄을 선다”라는 말도 나온다.

국민연금이 밝히는 ‘2010년 9월 30일 기준 5% 이상 보유 주식 내역’을 보면 금융회사 중 대우증권·메리츠화재해상보험·미래에셋증권·신한금융지주·우리투자증권·전북은행·키움증권·하나금융지주·한국외환은행·한국투자금융지주·현대해상화재보험·KTB투자증권·LIG손해보험이 올라와 있다. 최근 사업보고서 기준일인 2010년 12월 30일로 살펴보면 대우증권·미래에셋증권·한국외환은행 등은 5% 이상 보유 내역에서 빠져 있다.

이처럼 국내 금융회사에 대한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정부로서는 ①국민연금이 직접 보유한 지분 ②국민연금이 위탁 운용을 맡기는 자산운용사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 ③정부가 최대 주주인 금융지주사를 통한 영향력 등 마음만 먹으면 전방위적으로 특정 기업 대주주를 압박할 수 있게 됐다. ‘펀드 자본주의’ 위에 ‘연금 자본주의’가 있는 셈이다.

이번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의 발언 배경으로 해석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전자 지분을 3.38% 보유하고 있다. 삼성생명 7.21%, 삼성물산 4.06% 등 삼성전자의 특수관계인 지분 총합은 17.59%다.

반면 국민연금의 지분은 5.00%, 씨티뱅크 N.A의 지분은 6.28%다(씨티은행 N.A는 DR의 위탁 기관으로 각각의 결재 권한은 개별 DR 소유자에게 있다). 그러나 59.3% 비중으로 표시된 소액 주주가 모두 순수 개인 투자자는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대표 펀드 중 하나인 ‘미래에셋디스커버리증권투자신탁5호(주식)(A) 공격투자형(1등급)’은 총 운용 자산이 5623억 원으로 펀드 내 삼성전자 비중이 11.06%(펀드 내 비중임)다.

또 다른 대표 펀드인 ‘미래에셋 인디펜던스증권투자신탁3호(주식) (A) 공격투자형(1등급)’도 운용 자산 6770억 원 중 삼성전자 비중이 12.06%다. 한국투신운용의 대표 펀드인 ‘한국투자네비게이터증권1호(주식)_A’는 운용 자산 1조7192억 원 중 삼성전자 비중이 9.46%다. 웬만한 주식형 펀드에서 삼성전자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실제로 오너와의 이해관계가 대립할 때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한다면 오너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삼성전자의 대주주인 삼성물산의 소유구조를 살펴보면 삼성SDI(7.18%)를 비롯한 특수관계인이 총 13.74%를 보유한 반면 국민연금이 7.94%를 보유하고 있다.

또 삼성물산의 대주주인 삼성SDI는 삼성전자가 19.6%, 국민연금이 5.86%를 가지고 있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연결고리마다 국민연금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1996년 에버랜드 증자 때 주주사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에게 주식을 몰아주기 위해 주식 배정을 포기하는 일은 앞으로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오너가 자식에게 비상장사의 주식을 헐값에 매입하게 하고, 그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기업 가치를 키운 뒤 상장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기업을 물려받는 관행이 과거처럼 유지되기 힘들다는 얘기다.

국민연금과 함께 국내 4대 연·기금으로는 사학연금·공무원연금·군인연금이 꼽힌다. 국민연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사학연금은 2010년 기금 규모가 8조8766억 원이다. 국민연금의 37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주식 투자 비중은 1조6999억 원으로 국민연금의 32분의 1 수준이다. 국내 직접투자가 7435억 원, 간접투자가 9564억 원이다.

오너 일가 위해 주주 희생 ‘안 될 소리’

사학연금은 경영 공시를 통해 2010년 1분기의 의결권 행사 내용을 밝히고 있다. 주주총회에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한 기업은 조선내화·세방·포스코·SBS·KCC· KT&G다. 각 기업의 지분율은 표시하지 않았다.

사학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기업의 지분율을 밝히지 않은 것은 공무원연금이 밝힌 지분 내역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보유 지분 규모가 워낙 작기 때문이다. 기금규모 7조9056억 원(2010년)으로 사학연금보다 다소 작은 공무원연금이 2010년 초 주주총회에 의결권을 행사한 기업은 포스코·SK텔레콤·LG상사·LG디스플레이·현대모비스·삼성전자·대한항공·삼성SDI·삼성전기·제일모직·풍산·우리금융지주·서부T&D·온미디어·AP시스템·CJ인터넷이다.

그 중 가장 많은 지분율은 AP시스템으로 2.29%였다. 그러나 시가총액이 큰 대기업은 모두 1% 미만이었다. 삼성전자는 0.06%, 포스코는 0.05%, SK텔레콤은 0.04%, 현대모비스는 0.1%였다.

가장 규모가 작은 군인연금의 기금은 4654억 원(2009년)으로 사학연금의 19분의 1, 국민연금의 696분의 1 규모로 4대 연·기금으로 꼽히기에 다소 초라한 규모다. 자산운용사에서 운용하는 대표 펀드들도 대개 5000억 원이 넘는다.

군인연금에 따르면 “100만 공무원이 가입하는 공무원연금과 달리 60만 군인 중 장기 복무 하사관과 장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규모라고 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2010년 군인연금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군인연금은 3828억 원을 ‘시중은행과 증권회사’에 맡기는 것으로 나와 있다.
외국인 밀어내고 시장 ‘좌지우지’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