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와 ‘장인 정신’

“나는 옛날 경상도식 된장에 길들여져서 자라났습니다. 집의 거의 모든 반찬은 ‘지렁’이라고 불리던 조선간장으로 간이 맞춰지곤 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시중에서 판매되는 개량된장들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제대로 된 된장이 그리워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는 글이다. 누구나 한번쯤 된장이나 청국장을 먹으면서 옛날 맛이 안 난다며 ‘맛 타령’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맛이 변한 것도 있지만 아마도 진짜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있는 집안에서도 이제는 된장을 담그지 않는다. ‘어머니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 그야말로 진짜는 맥이 끊어진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우리들은 ‘진짜 음식’을 외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며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진짜 같은 가짜’들이 밥상을 수놓았었다. 음식점들은 가짜를 내놓으면서 진짜라고 속였다.

누구나 ‘원조’를 내세웠다. 하지만 정작 ‘원조’를 먹을 수 없었고 대신 ‘원조를 앞세운 가짜 원조’만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가짜를 진짜처럼, 원조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양평의 한 음식점에서 된장을 산 적이 있다. 음식으로 팔고 직접 된장도 팔았다. 맛이 달착지근해 먹기 편했다. 한번은 이 된장이 ‘오리지널’이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재래식 된장이 아니죠. 요즘 사람들 입맛에 맞춰 재래식 된장과 가공 된장을 반씩 섞어서 팔아요. 요즘 새댁들은 재래식 된장을 먹지 않아요. 오히려 섞어 파는 게 더 잘 팔리죠.” 이 말을 듣고 여간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사 먹은 게 제대로 된 재래식 된장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 후 그 집에 발길을 끊었다.

한번은 시골에 사는 이모가 된장을 보내왔다. 가공 된장은 누런빛이 나는데 이모가 준 된장은 카키색을 띠었다. 이모는 이게 진짜 재래식 된장이라고 했다. 아내가 그 된장으로 국을 끓였는데 아내는 먹지 않았다. 진짜로 위장한 된장에 너무 ‘오염’된 탓에 진짜 재래식 된장 맛에 적응되지 않은 것이다.

가공 된장을 원조라고 믿는 이유는?
12집 발표하는 김건모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가수 김건모가 솔(Soul)을 베이스로 한 흑인음악을 담은 12집을 7월에 발표한다. 
maum@yna.co.kr (끝)
12집 발표하는 김건모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가수 김건모가 솔(Soul)을 베이스로 한 흑인음악을 담은 12집을 7월에 발표한다. maum@yna.co.kr (끝)
음식점은 이제 김치 맛만 일품이어도 맛집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더러는 ‘진짜 음식’을 찾아 ‘고난의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건강을 잃으면 그때부터 사생결단으로 먹을거리에 신경 쓴다. 제일 먼저 재래식 된장과 청국장을 찾는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재래식’ 운운 하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취급을 하던 그들이었다.

‘먹고 살기 시작하면 병이 난다’는 말도 있다. 돈을 악착같이 벌어 이제야 호강을 누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만 덜컥 탈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진짜’의 힘에 굴복하기 시작한다. 비굴할 정도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재래식 음식’의 숭배자처럼 보인다. 여기에 지구적인 환경 재난도 위기의식을 부채질한다. 먹을 음식도 이제는 직접 재배하거나 무공해가 아니면 안심하지 못한다. 유기농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이제야 거칠지만 독이 없는 진짜가 귀한 시대가 되고 있다. 진짜 같은 가짜, 유사한 가짜보다 ‘진짜’가 팔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진짜’가 소비되는 것은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가수들로 세상이 시끌시끌하다. 어디를 가도 가수들의 이야기가 화제다. ‘슈퍼스타K 2’가 인기를 끌자 MBC 스타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이 생겨나 인기를 끌었다.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은 바로 ‘생방송’에 있었다. 생방송에서 가짜는 금세 드러난다. 생방송은 진짜 가창력 있는 가수들조차 ‘공포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MBC TV 프로그램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톱스타로 시대를 풍미한 김건모가 이 프로그램의 노래 경연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건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2011년 3월 27일 방송된 MBC ‘우리들의 일밤’의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서 김건모가 재도전 미션으로 무대에 섰다. 이때 부른 노래는 정엽의 ‘유 아 마이 레이디(You are my lady)’였는데 극도의 긴장을 감내하는 20년 차 가수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의 열창에 시청률(13.7%)이 상승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소설가 이경자 씨는 “여자 아이들 나와서 엉덩이 흔드는 것 안 보고 혼신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니, 나 같은 늙은이는 이제 살았다 싶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동안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 부르는 흉내를 내는 진짜의 시뮬라크르인 ‘복제 가수’들에 식상했던 기성세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진짜 가수’의 모습에 가슴 서늘한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는 시작부터 논란에 시달렸다. 일부 가수들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며 비판했다. 문화 평론가 진중권은 ‘나가수’에 대해 “프로그램 자체가 미스컨셉션(Misconception)”이라는 촌평을 내놓기도 했다. 진중권은 트위터에 “서바이벌이냐 리바이벌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김건모 재도전 논란을 바라보며 가창력으로 신인 가수를 뽑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자기 세계를 가진 예술가들을 데려다 놓고 누굴 떨어뜨린다는 발상 자체가 미학적 관점으로 난센스”라고 했다.

그러나 ‘나가수’는 미스콘셉트인지는 몰라도 미학적으로 난센스라고 하더라도 대중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가수’에서는 다름 아닌 ‘가짜’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생한 ‘진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페셔널이더라도 기득권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톱 가수인데’라고 거들먹거리거나 립싱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위치에 올라가면 기득권에 안주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나가수’는 그런 기득권적 질서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더욱이 노래 흉내만 내는 ‘가짜’들은 무대에 설 수 없다. 이른바 ‘걸그룹’들은 가수의 이미지, 욕망의 판타지로 청각이 아닌 시각을 자극했고 대중에게 가창력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비를 강요하디시피 했다.

섹시 코드의 이미지로 가수 흉내만 내는 시뮬라크르(복제)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사회가 욕망의 판타지, 판타지의 욕망에 도취돼 갔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진짜 음악의 묘미에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창력 없는 걸그룹들과 섹시 코드의 춤, 그리고 욕망의 판타지들이 난무하는 과잉 이미지에 시청자들이 식상했기 때문이다.

가창력이 아닌 이미지의 소비에 대중들이 식상할 즈음 ‘나가수’가 등장했다. 다시금 대중은 가짜가 아닌 진짜, 복제품이 아닌 원본, 이미지가 아닌 실체를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걸그룹들은 대부분 무대에서 ‘라이브’로 노래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가수’ 방송을 통해 화제가 된 곡들은 어김없이 음원 차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이것은 대중들이 그만큼 라이브의 목소리를 갈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피카소를 서바이벌에 세운다면?

이것이 바로 ‘진짜의 힘’일 것이다. 그동안 진짜 같은 가짜에 식상한 소비자들은 이제야 진짜다운 진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다. 진짜 음식, 진짜 음악이 대접받는 시대가 다시 온 것이다.

성급할지 몰라도 이른바 ‘진짜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진짜를 내세운 가짜, 아마추어 같은 프로페셔널, 무늬만 프로페셔널이어도 대접받을 수 있었다.

진짜들도 진짜끼리 경쟁해야 하는 시대야말로 진정 프로페셔널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창력을 앞세운 가수들은 가수들끼리 경합을 벌이고 진짜 음식의 대가들은 대가들끼리 경연을 벌인다면 그 즐거움, 그 진짜 문화의 수혜자들은 다름 아닌 대중들, 소비자들이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시처럼 껍데기로는 결코 마음을 적시지 못한다. 이제부터 모든 비즈니스의 철칙은 ‘진짜라야 팔린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진짜 비즈니스’ 시대의 도래를 기대해 본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