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전쟁의 최전선, 세계의 싱크탱크를 가다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싱크탱크 산업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 4년 새 세계 싱크탱크 숫자는 27.6% 증가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정책 연구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세계경제에서 영향력이 커진 중국 등 거대 신흥 국가들도 싱크탱크 키우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전통적인 ‘워싱턴 모델’에서 벗어난 다양한 싱크탱크의 등장도 도드라진 특징이다.

정책 이슈들이 이미 국경을 넘어 복잡하게 얽히면서 싱크탱크들의 세계화와 지구적 차원의 네트워크 강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싱크탱크의 원조는 1884년 창설된 영국의 페이비언협회다.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빈곤과 노동문제를 해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민간 두뇌들이 나서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하면서 싱크탱크라는 두뇌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SPECIAL REPORTⅡ] '싱크탱크 르네상스'… 글로벌 지식 네트워크 뜬다
하지만 싱크탱크를 ‘산업적 차원’으로까지 활성화해 꽃피운 곳은 단연 미국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1970년대 석유파동,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응해 어떻게 미국의 국익을 유지할 것인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워싱턴의 수많은 싱크탱크가 출현했다.

싱크탱크가 미국에서 발달한 것은 정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각료급 이하 5단계까지 정부 관리 4000~5000명이 한꺼번에 교체되는데, 이 고급 관리의 상당수가 싱크탱크 출신으로 채워진다. 이 때문에 정권 교체 때가 되면 싱크탱크에서 정부로, 또 정부에서 싱크탱크로 대대적인 인력 이동이 이뤄진다. 미국 특유의 ‘회전문 인사’다.

싱크탱크 4년 새 27.6%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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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탱크의 활약은 오마바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바마 정부의 정책 청사진을 작성한 것은 미국진보센터다. 이 센터가 작성한 657쪽의 보고서 ‘미국을 위한 변화’에는 ‘전 국민 건강보험’ 도입안은 물론 부시 독트린에 대한 재검토와 이라크에서의 단계적 철군, 부자들에 대한 최고 소득세율 인상 등의 정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워싱턴의 밤을 밝히고 있는 싱크탱크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워싱턴 한 도시에 393개나 되는 싱크탱크가 밀집해 있다. 영국(278개)이나 독일(191개) 전체의 싱크탱크보다 많은 숫자다. 워싱턴보다 더 많은 싱크탱크가 있는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미국에 워싱턴 스타일의 초대형 종합 싱크탱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작지만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강소 연구소, 핵심 인력만 두고 이슈를 중심으로 전 세계 학자들을 묶는 네트워크형 연구소, 환경이나 에너지 반세계화 등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안 연구소 등 다양한 유형의 싱크탱크들이 미국 전역에 포진해 있다.

최근 새롭게 불붙은 ‘싱크탱크 르네상스’는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지구적인 현상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TTCSP)’에서 매년 조사해 발표하는 세계 싱크탱크 순위(Global Go-To Think Tanks)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2006년 처음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각 기관에 대한 설문 조사와 전 세계 전문가 250여 명의 패널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진행되고 있다. 전수조사가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세계 싱크탱크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조사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월 발표된 조사 결과를 보면 2010년 세계 싱크탱크 숫자는 6480개로 나타났다. 조사가 처음 시작된 2006년(5080개)에 견줘 27.6%가 늘어난 수치다. 지역별로는 북미가 1913개(30%)로 가장 많았고 유럽(1757개, 27%), 아시아(1200개, 18%)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아시아 지역 싱크탱크의 급증세가 두드러진다. 중동 등 다른 지역에서도 싱크탱크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 나라별로는 미국이 1816개로 가장 많고, 이어 중국(425개)·인도(292개)·영국(278개)·독일(191개)순이다. 한국은 35개 연구소가 조사 대상에 포함돼 아시아에서 중국·인도·일본·대만 다음이었다.

2010년 세계 싱크탱크 1위는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차지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국제 개발, 건강 정책, 안보 및 국제 문제, 국내 경제, 국제 경제, 사회 정책, 혁신적 정책 제안, 뛰어난 정책 연구 프로그램, 시민 참여를 위한 인터넷 활용, 언론 활용, 정책 영향력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1위에 올라 미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라는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상위 25위까지를 보면 미국 싱크탱크들이 12개로 절반을 차지했고 영국이 5개로 뒤를 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중국사회과학원(24위)이 톱25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중국, 세계 싱크탱크 포럼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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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7월 중국 베이징에 브루킹스연구소 등 세계 최상위 싱크탱크 30여 곳을 포함해 100여 개의 싱크탱크 대표들이 일제히 집결했다. 세계 싱크탱크의 새로운 파워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개최한 ‘세계 싱크탱크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싱크탱크의 중심지는 미국이지만 세계 싱크탱크를 하나로 묶어 국제 포럼을 마련한 것은 중국이 처음이다. 그만큼 중국에서 싱크탱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세계 싱크탱크 포럼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먼델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등 유명 인사와 세계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상당수가 참가했다. 중국 언론들은 2009년을 ‘중국 싱크탱크 원년’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중국은 2006년에도 베이징에서 ‘제1회 중국 싱크탱크 포럼’을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포럼의 규모나 해외의 관심도는 3년 만에 확 달라졌다. 포럼에 참가한 외국 유명 연구 기관 숫자가 크게 늘었고 수백 개의 해외 언론이 앞 다퉈 보도에 나섰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중국에서 싱크탱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싱크탱크 포럼을 주최한 곳은 중국 국제경제교류센터(CCIEE)다. 원자바오 총리의 지시로 만들어진 반관반민 성격의 ‘슈퍼 싱크탱크’다. 중국 싱크탱크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국영 싱크탱크들과 달리 민간 자본으로 운영되며 해외 싱크탱크와의 교류, 협력에도 적극적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는 중국사회과학원이다. 펜실베이니아대의 세계 싱크탱크 순위에서도 24위를 차지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위상과 역사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덩샤오핑은 1977년 5월 중국과학원에서 사회과학원을 분리, 독립시키면서 그의 정책 브레인 역할을 맡겼다. 이후 사회과학원은 중국 정부의 제1 싱크탱크로 자리 잡았다.

사회과학원의 조직은 방대하다. 산하 연구소가 31개에 달하고 별도 연구센터도 45개나 된다. 총인원 4200여 명 가운데 연구 인력이 320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박사급을 포함한 고급 전문 연구원이 1700명을 차지한다.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 산하 사회과학원 43개까지 합치면 중국 전체 사회과학원 네트워크의 연구 인력은 1만 명이 훨씬 넘는다. 젊은 인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고 연구원들의 자긍심도 대단하다.

중국 정부의 각 부처들도 자체 연구 조직을 갖고 있다. 재정부의 재정연구소, 상무부의 국제경제연구소,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거시경제연구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 부처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연구 결과를 정기·부정기적으로 내놓는다.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은 공산당과 국무원의 정책연구실이다. 외부 싱크탱크들의 건의는 이곳을 거치면서 걸러지고 종합, 재구성돼 실질적인 정책 결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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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영국 싱크탱크들

펜실베이니아대 조사는 중국 싱크탱크 숫자를 425개로 파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중국 싱크탱크 연구자들은 중국 내 싱크탱크 숫자를 200 0~2700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 연구 기관들의 실체를 파악하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국 내 거의 모든 시·현급 정부 조직과 당 조직에 정책연구실이 있으며 이들은 영향력과 기능에서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에선 90% 이상의 싱크탱크가 민간 조직인 반면 중국에선 90% 이상이 정부 산하 기관이라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세계 싱크탱크들이 앞 다퉈 중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 2006년 칭화대와 손잡고 ‘브루킹스-칭화 공공정책연구센터’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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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뒤질세라 카네기재단도 지난해 ‘카네기-칭화 글로벌정책센터’를 열었다. 카네기재단은 중국 공산당 간부 교육을 맡는 공산당교 국제전략연구소, 상하이사회과학원 법학대학 등과 장기 학술 교류도 진행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브리스틀대, 맨체스터대는 2007년 공공기금 500만 파운드를 지원받아 ‘영국대학-중국센터(BICC)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독일의 최고 싱크탱크 중 하나로 꼽히는 과학정치재단도 중국 관련 연구를 늘리고 있다. 러시아는 4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중국 문제 연구 기지인 극동연구소를 가동 중이다.

이처럼 싱크탱크들이 중국과의 교류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중국 변수를 빼놓고는 실효성 있는 정책 연구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세계 싱크탱크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맥간 박사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파트너십 확대 등 싱크탱크의 글로벌화는 지난 10년 동안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라며 “국가나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글로벌 차원에서 정책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싱크탱크의 흐름 중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정치 엘리트보다 밑으로부터의 변화, 생활 속의 실천을 강조하는 싱크탱크의 등장이다. 삶이 현장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영국의 진보적 싱크탱크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정책실장을 지낸 제프 멀건이 2005년 새롭게 리모델링한 영파운데이션에는 연구만 하는 인력이 따로 없다. 영파운데이션 60여 명의 ‘연구원’은 때로는 조언자이자 상담자이면서 연구자이자 새로운 사회사업의 개발자가 된다. 연구자인 동시에 실천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식 싱크탱크를 ‘낡은 모델’로 평가한다. 지나치게 이론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영파운데이션은 단순히 아이디어와 연구 결과를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책을 실천 속에서 검증해 보여준다. 영파운데이션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교육 불평등 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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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